-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우리나라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가 70년 7월 7일 준공됐다. 68년 2월 착공, 전 구간이 왕복 4차선도로로 준공된 것. 현재는 길이 425.48㎞, 너비 22.4m, 왕복4∼8차선이다.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부산간고속도로(고속국도 1)로 지정되었고, 1985년 4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남이∼회덕 간 21.7㎞ 구간의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왕복6차선으로 확장됐다. 기존의 철도·국도와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고 있다.판교분기점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남이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7.14 09:00
-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우리나라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가 70년 7월 7일 준공됐다. 68년 2월 착공, 전 구간이 왕복 4차선도로로 준공된 것. 현재는 길이 425.48㎞, 너비 22.4m, 왕복4∼8차선이다.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부산간고속도로(고속국도 1)로 지정되었고, 1985년 4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남이∼회덕 간 21.7㎞ 구간의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왕복6차선으로 확장됐다. 기존의 철도·국도와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고 있다.판교분기점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남이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7.14 09:00
-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87년 6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 이해 6월 29일 집권여당 민정당 대표 노태우씨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는 특별 선언을 했다. 일명 6·29선언.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대통령은 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4·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생 박종철씨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이때부터 ‘6월 항쟁’이 시작됐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됐다. 결국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 등을 받아들여,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7.06 09:00
-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87년 6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 이해 6월 29일 집권여당 민정당 대표 노태우씨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는 특별 선언을 했다. 일명 6·29선언.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대통령은 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4·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생 박종철씨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이때부터 ‘6월 항쟁’이 시작됐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됐다. 결국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 등을 받아들여,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7.06 09:00
-
1973년 6월 22일 "현수교 남해대교 개통"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73년 6월 22일 개통됐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일어난 곳이다.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1977년 6월 22일 "김형욱미국 의회 증언" 1977년 6월 22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 의회에서 충격적인 증언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형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도 재직 중에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특히 박 정권에 대한 비난을 가하면, 그의 권총 위협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7.01 09:00
-
1973년 6월 22일 "현수교 남해대교 개통"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73년 6월 22일 개통됐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일어난 곳이다.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1977년 6월 22일 "김형욱미국 의회 증언" 1977년 6월 22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 의회에서 충격적인 증언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형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도 재직 중에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특히 박 정권에 대한 비난을 가하면, 그의 권총 위협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7.01 09:00
-
1957년 6월 16일 "시인 노천명 별세" 1957년 6월 16일 ‘사슴 시인’이라는 애칭이 따라붙는 시인 노천명씨가 세상을 떠났다.이화 여전 출신인 그녀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매일신보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일제시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들을 써,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시작활동을 보면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45년 두 번째 시집 ‘창변’을, 1953년 세번째 ‘별을 쳐다보며’를 출간했다. 시 외에도 수필을 적지 않게 발표하여 48년 수필집 ‘산딸기’등을 출간했다. 1988년 6월 1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23 09:00
-
1957년 6월 16일 "시인 노천명 별세" 1957년 6월 16일 ‘사슴 시인’이라는 애칭이 따라붙는 시인 노천명씨가 세상을 떠났다.이화 여전 출신인 그녀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매일신보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일제시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들을 써,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시작활동을 보면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45년 두 번째 시집 ‘창변’을, 1953년 세번째 ‘별을 쳐다보며’를 출간했다. 시 외에도 수필을 적지 않게 발표하여 48년 수필집 ‘산딸기’등을 출간했다. 1988년 6월 1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23 09:00
-
1967년 6월 8일 "제7대 의회, 공화당 개헌선 돌파"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결과 여당인 공화당이 압승했다. 특히 공화당은 개헌선을 돌파,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기 한달 전인 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극도의 혼탁상을 면치 못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부정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9월 14일 개헌지지서명을 했던 122명의 의원들은 야당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16 09:00
-
1967년 6월 8일 "제7대 의회, 공화당 개헌선 돌파"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결과 여당인 공화당이 압승했다. 특히 공화당은 개헌선을 돌파,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기 한달 전인 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극도의 혼탁상을 면치 못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부정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9월 14일 개헌지지서명을 했던 122명의 의원들은 야당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16 09:00
-
1970년 6월 2일 "‘오적’ 필화사건, 김지하 구속" 1970년 6월 2일 ‘오적’의 작가 김지하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김씨는 이해 5월 ‘사상계’에 담시(譚詩) 「오적」을 발표,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는 3선개헌 반대파동으로 혼란의 시기로 군사독재와 이에 대항하는 세력간에 첨예한 마찰이 고조되고 있었다. 3선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걸림돌을 제거한 박정희 정권은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과 금제에 치중한다. 특히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론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삼엄해진다. 이런 시점에서 ‘사상계’는 김지하의 저항적 풍자시 「오적」을 실은 것. 그리고 ‘오적’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에 연루됐다. 원래‘오적’이 ‘사상계’에 발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시판을 하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08 09:00
-
1970년 6월 2일 "‘오적’ 필화사건, 김지하 구속" 1970년 6월 2일 ‘오적’의 작가 김지하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김씨는 이해 5월 ‘사상계’에 담시(譚詩) 「오적」을 발표,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는 3선개헌 반대파동으로 혼란의 시기로 군사독재와 이에 대항하는 세력간에 첨예한 마찰이 고조되고 있었다. 3선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걸림돌을 제거한 박정희 정권은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과 금제에 치중한다. 특히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론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삼엄해진다. 이런 시점에서 ‘사상계’는 김지하의 저항적 풍자시 「오적」을 실은 것. 그리고 ‘오적’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에 연루됐다. 원래‘오적’이 ‘사상계’에 발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시판을 하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08 09:00
-
1942년 5월 25일 "소설가 이효석 별세" 한국 단편문학의 수작으로 꼽히는 의 작가 이효석씨가 42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강원도 평창 출신의 이효석은 1925년 매일 신보 신춘 문예에 당선된 뒤 등단했다. 1928년 에 단편 ‘유령과 도시’를 발표하면서 경향 문학의 동반 작가로 인정받았다. 계속해서 ,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성격을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순수 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향토적, 이국적, 성적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특이한 작품 세계를 시적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을 발표하였다.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01 09:00
-
1942년 5월 25일 "소설가 이효석 별세" 한국 단편문학의 수작으로 꼽히는 의 작가 이효석씨가 42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강원도 평창 출신의 이효석은 1925년 매일 신보 신춘 문예에 당선된 뒤 등단했다. 1928년 에 단편 ‘유령과 도시’를 발표하면서 경향 문학의 동반 작가로 인정받았다. 계속해서 ,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성격을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순수 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향토적, 이국적, 성적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특이한 작품 세계를 시적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을 발표하였다.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6.01 09:00
-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발생"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사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됐다.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신군부는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5.25 09:00
-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발생"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사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됐다.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신군부는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5.25 09:00
-
1956년 5월 12일 " 첫 TV방송국(HLKZ) 개국" 국내 첫 텔레비전 방송국 HLKZ가 1956년 5월 12일 개국했다. 이 TV 방송의 설립자는 황태영씨로, 그는 정부의 공보처 의뢰로 KBS라디오 자재 도입차 미국에 갔다가 RCA회사로부터 받을 수수료 대신 그 회사와 합작으로 TV기재를 도입해서 HLKZ-TV를 설립했다. HLKZ-TV의 가시청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16∼24km였고 개국 초 전국의 텔레비전수상기는 미군소유를 제외하고 고작 300대 미만이었다. HLKZ-TV는 처음부터 상업방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수입을 광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의 상황이 TV광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상업경제의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 12시간 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출혈을 하지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5.18 09:00
-
1956년 5월 12일 " 첫 TV방송국(HLKZ) 개국" 국내 첫 텔레비전 방송국 HLKZ가 1956년 5월 12일 개국했다. 이 TV 방송의 설립자는 황태영씨로, 그는 정부의 공보처 의뢰로 KBS라디오 자재 도입차 미국에 갔다가 RCA회사로부터 받을 수수료 대신 그 회사와 합작으로 TV기재를 도입해서 HLKZ-TV를 설립했다. HLKZ-TV의 가시청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16∼24km였고 개국 초 전국의 텔레비전수상기는 미군소유를 제외하고 고작 300대 미만이었다. HLKZ-TV는 처음부터 상업방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수입을 광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의 상황이 TV광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상업경제의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 12시간 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출혈을 하지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5.18 09:00
-
1982년 5월 4일 "대검, 이철희·장영자 구속"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 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이 사건은 1982년 5월 4일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어음사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일어났다. 건국 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이자 권력형 금융비리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으며,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병폐의 한 단면을 드러낸 사건으로 꼽힌다.특히 ‘장·이 어음사기 사건’은 정계·경제계를 비롯, 사회의 각 분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경제계에 불어닥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금융혁명’으로 일컬어지는 6·28조치가 단행되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정치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5.13 09:00
-
1982년 5월 4일 "대검, 이철희·장영자 구속"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 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이 사건은 1982년 5월 4일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어음사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일어났다. 건국 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이자 권력형 금융비리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으며,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병폐의 한 단면을 드러낸 사건으로 꼽힌다.특히 ‘장·이 어음사기 사건’은 정계·경제계를 비롯, 사회의 각 분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경제계에 불어닥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금융혁명’으로 일컬어지는 6·28조치가 단행되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정치
명리풍수
공문룡 칼럼니스트
2004.05.13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