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족의 세계

밤마다 도심을 질주하며 ‘심야의 무법자’로 악명을 떨쳐온 폭주족들이 최근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됐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13일 시내 도로에 차량을 몰고 나와 곡예운전 등으로 교통흐름을 방해한 혐의로 폭주족 카페 운영자 오모(24)씨 등 2명을 구속하고, 이모(17)군 등 회원 21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에 적발된 폭주족 카페는 19개, 총 회원이 12만 4,659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다.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100여개의 폭주족 관련 카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폭주족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10대 청소년 위주의 일명 ‘오폭’과 승용차를 이용한 20~30대 위주의 ‘카폭’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일부는 견인차(레커)나 구급차, 병원차량을 몰고 나와 폭주에 참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주족들의 주무대는 여의도 둔치와 코엑스, 뚝섬유원지. 이들은 이곳에서 각각 정기모임을 가진 뒤 광화문, 종로 일대에서 합류, 서울 시내를 휘젓고 다니며 ‘광란의 질주’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역할분담·행동수칙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히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역할과 행동수칙을 통해 체계적인 방법으로 폭주 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리더’, ‘칼받이’, ‘뒤커버’다.

리더는 폭주 대열 지휘자로 야광봉을 이용해 대열의 주행방향과 속도를 조정한다. 칼받이는 ‘앞커버’라고도 불리며, 폭주대열이 교차로를 지나고 중앙선을 넘을 때 다른 차량을 가로막거나 밀어붙이는 일을 담당한다. 뒤커버는 경찰 차량의 추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또 ‘리더를 추월하지 말라’, ‘카폭은 1차선으로 다닌다’, ‘폭주 시 심심하면 112에 신고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행동수칙을 만들고, 그대로 이행할 정도로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들은 경찰단속에 철저히 대비하는 주도면밀함도 잊지 않았다. 회원들은 행동수칙에 ‘경찰단속이 심한 곳은 다니지 않는다’, ‘만약 경찰이 나타나면, 절대 흩어지지 말고 리더의 지시를 따른다’, ‘경찰 추적이 있을 때 천천히 간다’고 정하고 있다. 빠르게 달리면서 흩어질 경우 경찰의 단속망에 잡히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경찰 단속을 피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정기모임 장소를 노출하지 않고, 회원들 간에 메신저나 휴대폰을 통한 연락만을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폭주 후 카페에 사진 등 게시물을 올릴 때에는 차량 번호를 삭제한 채 올려 경찰의 단속망을 교묘히 피해가는 지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4일 서초경찰서에서 만난 한 폭주족(여·19·5년 활동)은 “보통 20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니기 때문에 ‘막무가내식 폭주’로는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어렵다”며 “게다가 대형사고를 당할 가능성도 커, 각자의 역할 분담과 행동수칙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범죄 의식 무감각

그렇다면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거침없는 폭주’를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9년 경력의 한 폭주족(남·25)은 “폭주 역시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다”며 “솔직히 술, 담배 를 끊는 것보다 폭주를 끊는 것이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폭주의 스릴과 쾌감을 한번 맛본 사람은 ‘환상(영웅심리)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

이어 그는 “이번에 경찰조사를 받고 나간 후에도 상당수 폭주족들은 당일 새벽에 모여 폭주를 벌였다”며 “심지어 이번에 불구속 입건된 한 회원은 트럭에 부딪혀 3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또 다시 폭주를 하러 나가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이러한 폭주의 중독성 때문에 이들은 ‘폭주’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분위기라고.

또 다른 폭주족(남·26)은 “폭주 시 더 화끈한 스릴을 맛보기 위해 술을 먹고 차량을 모는 것은 기본”이라며 “환각제를 복용하고 달리는 폭주족들도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보통 환각제는 남대문 시장에서 보따리 장사하는 아줌마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데, 한번에 5~6알씩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술 취한 듯 기분이 좋아져, 이를 필수로 복용한 후 달리는 폭주족들이 늘고 있다는 게 경찰의 설명. 이 환각제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돼 법으로 금지하고 있
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환각제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부 10대 폭주족들은 폭주를 하기 위해 길거리 오토바이를 훔쳐서 불법 개조해 몰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단속하면 그냥 버리고 도망가기 좋기 때문에 일부러 오토바이를 훔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밝혔다.

이어 경찰은 “뿐만 아니라 폭주족에 속해 있는 여성들을 오토바이 뒤에 태워주고, 그걸 미끼로 성관계를 맺는 폭주족들도 적지 않다”며 “실제로 폭주족 모임에서 만나 원나잇스탠드로 엮인 ‘부부폭주족’도 있다”고 전했다.

이 부부폭주족은 10개월 된 아이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폭주에 나서다 이번에 적발된 케이스. 이 부부는 “아이가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부
릉부릉)와 급정거하는 소리(끼익)에 잠을 잘 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경찰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고 한다.

한편, 경찰은 “폭주족들 중 성경험이 없는 애들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면서 “광란의 질주 후 그저 광란의 하룻밤을 만끽하는 게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씁쓸해했다.


#“연예인·고위층 폭주족도 활동”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이번 폭주족 관련 수사를 하면서,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연예인이나 의사, 변호사, 군인 등 전문직이 활동하는 A폭주족사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 수사를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A사이트는 ‘감히 아무나 탈 수 없는’, ‘국내에 몇 대 안 되는’ 고급 외제차량을 소유한 이들의 모임이다. 또 전문직 종사자뿐만 아니라, 고위관계자, 부유층 자제 등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관심을 끈다.

한편, A사이트 내 회원들은 고급차를 모는 만큼,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걸고 하는 ‘내기 폭주’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수사를 확대 중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이어 경찰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연예인, 부유층 자제도 A사이트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하지만 최근 폭주족들이 무더기로 적발돼 경찰의 단속을 우려, 당분간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증거확보가 될 때까지 계속 예의주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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