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호남파’ 보스 오종철 양심고백

“내가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의 모든 것을 지시했다.”
‘범호남파’ 전 보스 오종철(63)씨가 사보이 호텔 기습사건의 내막에 대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 1975년 1월1일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에서 발생한 ‘조폭 혈전’, 속칭 ‘명동 사보이호텔 기습사건’의 주범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이 사건은 ‘범호남파’에서 활동하던 조양은(후 양은이파)이 부하들과 함께 생선회칼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하고 당시 폭력계의 ‘대부’ 신상현이 이끌던 신상사파의 신년회장을 기습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조양은은 이 사건으로 주먹계 ‘패권’을 장악한 인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먹계의 판도를 바꾼 상징적 혈전으로 알려진 ‘명동 사보이호텔 기습사건’. ‘범호남파’ 전 보스 오종철씨가 당시 사건의 내막과 진실을 직접 밝혔다.


“지금까지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나와바리(조폭들의 활동영역)를 둘러싸고 두 조직이 갈등을 벌이다 조양은이 신상사파를 급습한 뒤 범호남파가 패권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수사기관과 언론에서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왜곡시켰다. 소설처럼 과장된 부분도 많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조직 간의 이권다툼으로 인한 한 조직원의 임의적·자발적 행동은 절대 아니었다.”


사건의 발단은 ‘복수’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씨는 30여년 전을 회고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씨는 1970년대 당시 주먹계에 대한 상황부터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서울은 신상현이 이끌던 ‘신상사파’와 신흥세력으로 급부상한 ‘호남파’간의 양자대결 구도였다. ‘신상사파’는 이미 명동 등 서울 중심부를 장악하며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권력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오씨가 주도했던 ‘범호남파’는 광주·전주·목포·여수 등 호남지역 출신 주먹들이 주축이 됐다. 박종석(일명 ‘번개’), 조양은이 이 부류에 속했다. ‘범호남파’는 서울 무교동 유흥가를 무대로 세력을 키웠다. 무교동에 이어 충무로, 퇴계로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신상사파’에 위협적인 존재로 급성장했다.

‘나와바리’를 둘러싸고 두 조직 간의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오씨의 절친한 친구인 이모씨가 ‘신상사파’로부터 끔찍한 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씨는 주먹을 아주 잘 쓰는 학사건달이었죠. 경희대 체대를 졸업하고 모 금융권 인사의 보디가드를 맡고 있었는데, 돈 문제로 그 인사를 경호하며 서울에 올라왔다가 신상현을 만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친구 녀석은 자신의 의뢰인을 끝까지 보호하려다 시비가 붙었고, 결국 폭행을 당하게 된 것이다.”

오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명동 사보이호텔 725호에는 ‘신상사파’ 신상현을 비롯해 부산에서 알아주는 주먹 정경식, 구달홍, 일본 야쿠자 등 5명 정도가 있었다.

호텔 방안에서 주먹다짐이 여의치 않았던 탓일까. 정경식은 이씨에게 맞대결을 제안했고, 이씨는 정경식·구달홍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호텔 문을 벗어나는 순간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든 무리들이 이씨에게 덤벼들기 시작했고, 수적 열세에 밀린 이씨는 속수무책으로 구타를 당해야 했다고.


신상현과의 전쟁 선포

“그날이 1974년 12월 마지막날이었다. 사보이호텔에서 멀지 않은 뉴서울호텔에 이씨가 엎어져 있었다. 이름을 부르니까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데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정말 끔찍했다. 분노와 울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오씨는 만신창이가 된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며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을 지시한 것도 이날이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던 은석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소집을 명령했고, 신상현을 칠 것을 지시했다.

오씨에 따르면 당시 신상현을 공격하기 위해 3개조가 편성됐다. 사보이호텔의 3개의 출입구에 각각 1개조씩 투입, 도주로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오씨의 설명.

훗날 양은이파의 두목이 되는 조양은을 비롯해 노현구, 김철이 각조의 조장을 맡았다. 조양은에겐 신상현의 매제이자 최측근인 김수일을 처리하는 일이 주어졌다. 노현구는 신상현을, 김철은 또 다른 핵심인물을 처리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아울러 오씨의 오른팔인 은석은 ‘번개파’ 박종석을 ‘보호’하는 일을 맡았다. 신상현에게 충성하고 있지만, 한때나마 자신과 함께 ‘범호남파’의 주축세력이었던 점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라고.

이들은 신상현이 사보이호텔에 자주 드나든다는 점을 노렸다. 그리고 1월1일 ‘거사(?)’가 치러졌다. 낮 12시가 넘을 즈음, 신상현과 구달홍·번개·정경식 등 8명이 사보이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되자 곧바로 습격이 시작됐다.

조양은은 자신의 임무대로 신상현의 매제인 김수일을 만신창이를 만들었고, 오른팔 은석 역시 보스의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정작 ‘목표(?)’였던 신상현은 당시 현장에 없었다고 한다.

“내 친구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실질적인 지시와 지휘는 내가 했다. 지금에야 폭력사건이 발생하면 고소고발하면 되겠지만 가난해도 믿을 건 ‘주먹’뿐이었던 시절, 건달에게 고소 따위는 수치라고 생각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우정)’를 만신창이로 만든 만큼 똑같이 복수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오씨는 그러나 이 사건으로 도피생활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경찰의 수사력이 집중됐고, 이에 따라 오씨의 도주 기간도 길어졌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난 1976년 3월, 오씨는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인근에서 자신을 미행하던 김태촌(후 ‘서방파’)으로부터 습격을 당하게 된다. 오씨에 따르면 당시 김태촌은 ‘번개’ 박종석의 소개로 알게 된 신상현의 사주를 받고 오씨를 공격했다. 조양은과 김태촌이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인 것도 이 사건 때문이다.


또 다른 ‘복수’로

큰 부상을 입은 오씨는 결국 1년8개월 가량의 도피생활을 접고 그해 가을 경찰에 자수했다. 하지만 현장에 없었던 점을 들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는 검찰 문을 나서면서 신상현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고 했다. 그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복수의 기회를 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상현과 단 둘이 만나 복수할 기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오씨는 그러나 긴 시간동안 도피생활을 하면서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이 문득 떠올라 그 마음을 접었다고 전했다. ‘복수’는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씨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당시 사건의 진실을 털어놓는 이유 역시 ‘참회’와 ‘반성’의 의미다.

“그 당시엔 주먹에 대한 복수는 주먹뿐이라고 믿었다.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정정당당하게 주먹으로 결판을 내는 사내가 진정한 건달이고, 그것만이 깡패와 건달을 구분하는 갈림길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나이 60(세)이 넘고 돌아보니까 결국 사람 마음속의 욕심과 분노가 문제였고, 그것이 화(禍)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주먹세계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한 고향 후배의 소개로 개척교 목사를 만나면서 새 삶을 찾았다고 했다. 현재 오씨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임마누엘 교회 집사로 활동,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선교활동에 누구보다 힘쓰고 있다.

“평범한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싶다. 늘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다. 앞으로도 집사로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과거의 일을 참회할 생각이다.”


#“조양은은 ‘주먹’, 김태촌은 진짜 ‘칼잡이’”

오종철씨는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사건’과 관련, 잘못된 사실이 하나 더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흉기’ 사용과 관련된 내용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주먹으로 승부 짓는 시대는 사라지고, 생선회칼·일본도·쇠파이프 등의 무기가 등장하게 되는 ‘칼잡이’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씨는 그러나 사실과 조금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보이호텔 사건에서는 칼 등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조양은이 회칼을 들고 사보이호텔로 쳐들어가 피바다를 만들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도 왜곡·과장돼 지금까지 잘못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진짜 칼잡이는 김태촌이다. 김태촌이 호남 쪽에서 서울로 상경하면서 칼 등의 흉기사용이 시작된 것이라고. 오씨 역시 김태촌이 휘두른 칼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김)태촌이 일당이 나를 쓰러트린 뒤 에워싸고는 뭔가를 번쩍 들어 올리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추수할 때 쓰는 낫이었다. 처음엔 굽은 모양새가 도끼인줄 알았다. 비명 지를 시간도 없이 순간 몸을 피해 살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현재 오씨는 김태촌과 형님 아우하며 지내는 사이다. 김태촌이 사건 이후 오씨를 직접 찾아와 머리 숙여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했다고.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신상현이나 김태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이었는지 무혐의 처분 받고 나온 후에 신상현은 김수일을 통해 사과의 뜻을 전해왔더군요. 김태촌도 마찬가지죠.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진심이 전해지고 또 시간이 흐르니까 용서가 되더라
고요.”

한편 그는 현재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 ‘대조영’, ‘연개소문’, ‘들불’과 같은 주옥같은 작품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인 유현종 작가가 집필을 맡았다. 올 가을께 발간예정이다. 회고록에는 오씨의 일대기와 더불어 한국 주먹계의 ‘숨겨진 진실’도 담길 예정이라고 한다. 과연 회고록을 통해 풀어낼 이야기들이 무엇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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