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의 계절 변화와 함께 행락길 들국화가 한창이었다. 장내 주식시장에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관련 주식이 상장되자마자 상종가를 쳤다. 반 총장은 최근 실시한 한 여론조사기관의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39.7%의 지지를 얻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조사는 반 총장을 대권주자 반열에 올려놓고 시행한 첫 선호도 조사였다.

2위인 박원순 서울시장 지지도 13.5%와 3위인 문재인 의원(9.3%), 4위인 김무성 대표(4.9%), 5위의 안철수 의원(4.2%) 지지율을 다 합친 수치보다 반 총장 지지율이 높다는 점에서 “정치에 몸담지 않겠다”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기성 정치권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이 정통외교관료 출신으로 현재 지위까지 오른 반 총장에게 기대를 거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반기문’ 대안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대표적 사례가 안철수 당시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한 50%대에 육박한 지지율이었다. 이듬해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 안철수’ 양자대결을 가상한 설문에 안철수를 선택한 유권자가 절반이 넘는 때가 있었다. 이때 안철수 관련 주식은 계속 상종가를 나타냈고 자신에 차있는 안철수 주변엔 온갖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런데 안 의원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국회의원 한 자리 외엔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그가 장외에서 장내로 상장되자마자 신상털기가 시작돼 정치력이 바닥을 보였다. 2012년 대선을 전후해선 오락가락 행보가 이어지면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결국 독자세력화에 실패한 안철수의 선택은 민주당과의 연합뿐이었다.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았으나 그의 위력은 벌써 옛말이 돼버린 터였다. 7.30 재보선 참패는 그를 재기불능 상태로까지 몰아넣었다.

1990년대 하늘을 찌를 듯했던 박찬종 인기가 몰락했던 것 역시 ‘개인기’는 강했으나 현실정치의 기반이 취약했던 때문이다. 2007년 고건 전 총리 지지도가 이명박, 박근혜를 크게 리드하고 영남에서까지 지지율이 폭등했으나 끝내는 불출마를 선언할 정도로 지지도가 급락했었다. 이 또한 다른 이유는 없었다. 반 총장이 그동안 여러 차례나 정치에 뜻이 없음을 밝혀왔다. 폭발하는 인기에 마취돼서 본연의 명예마저 침탈당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으려는 진심이 이해되고 남는다.

몇 번의 학습 효과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공 행진하는 지지도에 자칫 마음을 뺏기면 공중부양에서 나가떨어지듯 순식간에 추락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우뚝 세운 화려한 생애가 거품이 되고 만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의 초기상황은 이인제 경선후보가 노무현 후보를 ‘따따블’스코어로 토끼와 거북이 경주같이 앞지르는 판국이었다. 그랬던 경선 판이 노무현의 ‘광주대첩’으로 일거에 판이 뒤집히고 말았다.

그 여세를 몰아 당시 월드컵 바람을 타고 노무현을 더블스코어 차로 앞서며 급등하던 무소속 정몽준 후보와 둘만의 여론조사를 합의해 후보단일화에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무소속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정몽준 후보의 지지도 추락이 판세를 뒤집었다. 일본 속담에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사람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들어갈 때와 나설 때를 판단하는 데 명줄이 달려있다고 말한다. 산과 들마다 피는 꽃은 꽃마다 제 필 때를 아는데 사람만 제 나설 때를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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