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의 고장에서 의열을 배우다

제 1 부 나의 국정원 체험기

나의 국정원 체험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나란 누구인가’란 문제에 대해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하다. 전직 국정원 출신 직원이 왜 김대중 정권 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소한 신상잡설부터 늘어놓는 데 대해, 먼저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1. 이념의 바다에 빠지다

나는 1964년 경상남도 밀양의 어느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상남면 평촌리 대흥동이라는 곳이다. 평촌리라는 지명에서 보듯 우리 마을은 들판 한 가운데 있다.

대흥동은 일본식 명칭이다. 일제가 1930년대 초 산미증식 계획에 따라 전국의 황무지를 개간했을 때, 남천강의 제방을 쌓는 데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둑은 높이가 10여 미터에다, 길이는 족히 10 여 Km가 넘는 것이다. 낙동강 하구언보다 높고 길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고향마을 풍경은 언제나 이수복 시인의 ‘봄비’의 이미지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겄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겄다…. 나는 어린 시절 온전히 남천강가에서 자랐다.

남천강은 나의 젖줄 같은 것이었다. 여름철이면 소 먹이러 가서 강 중간으로 헤엄치고 들어가 강물을 마시곤 했다. 나는 나의 피 속에 남천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내 고향 밀양은 충절의 고장이다. 조선조 사림의 태두인 점필제 김종직 선생이 난 곳이다. 사림의 본거지이다 보니 유교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남아 있다. 조선후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절, 안동 사람들이 “소밀양(小密陽)" 이라고 비하하자, “소안동(笑安東)"이라고 응수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다. 밀양에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정조를 지켰다는 아랑의 전설이 살아 있다.

요즘도 아랑을 기념하여 매년 아랑제가 열린다. 우리 집안의 재실 이름은 탁삼재(卓三齋)이다. 충효열 세 가지 가치에 뛰어났다는 뜻이다. 밀양은 또한 의열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명대사를 배출한 곳이다.

한 자루 권총에 의지해 일제에 저항했던 의열단의 고장이기도 하다. 의열단이 1919년 4월 만주에서 처음 결성되었을 때, 의백이었던 김원봉을 비롯하여 단원 13명 중 7명이 밀양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부모님 이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위로 형이 두 명 있고, 누나와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나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문명의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았다.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재수가 좋은 날이어야 자동차를 한 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먼지 폴폴 날리며 지나가는 제무시(GMC) 트럭에 한참 메달려 갔다 돌아오는 놀이를 하곤 했다.

예습이란 말도 복습이란 말도 몰랐다. 학교 갔다 와서는 소먹이고 꼴 베며, 진흙탕 속에서 뒹굴면서 자랐다. 바쁜 농사철이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특히 소먹이고 꼴 베는 일은 내차지였다. 후에 내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을 때, 낫 하나씩 들고 제초작업을 했는데, 우리 중대에서 내가 낫질을 제일 잘했다. 그때 나는 ‘내가 천상 촌놈인게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우리 마을은 대흥동이라는 명칭과는 다르게 가난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특별히 가난하지는 않았다. 지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머슴을 한 사람 둘 정도로 꽤 농사를 많이 지었다. 덕택에 나는 어릴 적에 도시락을 못 사가 굶어 보았거나, 등록금을 못 내 야단맞은 적은 없었다. 물론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에 별로 관심이 없고 바깥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 하셨다.

그래서, 농사일은 주로 어머니 차지였다. 험한 농사일을 하느라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아마 이 세상의 어느 어머니보다 더 힘들게 사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고된 농사일에 단련되어, 한창때는 왠만한 남자들보다 근력이 좋았다.

(월간조선 2003년 3월 호 "노벨상 국제로비 진상" 제하의 기사에서 백승구 기자는 내가 자장면도 한 그릇 못 먹어 본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서술했었는데, 이는 조금 과장된 면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읍내 고전읽기 시험을 치러가서 처음으로 자장면을 먹었는데, 아직도 그때 먹은 자장면 맛이 기억에 새롭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고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매일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가셨다. 물론 할머니가 된 요즘에도 빠지지 않고 계속 나가고 계실 것이다. 기도 제목은 뻔하다. “하나님, 아직도 갈 길을 몰라 헤메고 있는 우리 셋 째 아들을 하나님 품으로 속히 돌아오게 하여 주시고, 크게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일 것이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에 다녔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갔다. 내가 다닌 시골 교회는 교인이 10여 명에 불과한 초미니 교회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교회에서 받은 상품으로 모든 학용품을 조달하다시피 했다. 나의 도덕관념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가던 날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영국이와 같이 2Km쯤 떨어진 학교까지 뛰어서 갔다. 도회지 아이들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첫 등교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장에는 많은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다.

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를테면 “정체성 위기"라는 걸 맛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 이름이 김기환인 줄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김기삼이라고 했다. 나의 호적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여덟 살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학교 선생님은 나를 “만으로" 다섯 살이라고 했다. 나는 “만으로"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선생님이 이름을 틀리게 부르고, 나이도 엉터리로 가르쳐준다고 생각했다. 괜히 뭔가 혼란스러웠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