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벅의‘대지’ 읽으며 혁명가 꿈 키웠다

목 차
나의 국정원 체험기

1. 이념의 바다에 빠지다
2. YS 정부의 정규 30기
3. 문민정부의 “넘버 3”
4. “여의도 김 소장입니다”
5. “여긴 착한 사람이 있을 데가 아냐”
6. “알면 다쳐”
7.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8. DJ 정권의 심장에 비수를 대다
9. 양심선언과 망명신청


나는 아직도 나의 이름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기삼’이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좀 촌스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끝에 숫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대체로 어감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아버님은 내가 태어난 후 즉시 호적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남자아이 가운데 셋째라는 생각에 그냥 별 뜻 없이 기삼이라고 등록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집에서는 기환이라 불렀다. 아직도 시골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이러다 보니 나의 호적상 생년월일은 실제보다 1년 늦어지고, 이름마저 틀려져 버린 것이다. 당시 시골에서는 영아 사망율이 높았기 때문에 “사는 것 봐 가며 호적에 올린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나의 출생에 관한 에피소드를 한 가지만 더 소개해 보자. 우리집은 어머님이 무척 건강했기 때문에 모두 두 살 터울이다. 그런데 유독 나와 바로 형은 네 살이나 터울이 졌다. 나는 그 점이 항상 궁금하였다. 언젠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어머니에게 그 점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다.

“어무이(어머니), 와(외) 히야(형)하고 내하고는 내 살이나 차이가 나는 교?"그러자,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가 세치(셋) 낳고 더 안 나을라 했는데, 할무이(할머니)가 하도 더 낳으라 케서(해서) 니하고 니 동생하고 나온 기다"라고 하셨다. 난 그 말을 듣고는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기삼’이란 이름에 콤플렉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가족계획 캠페인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전후 베이비붐이 일어 인구증가율이 지나치게 높았던 것이다. 지금처럼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이 세계 최저라서 아이를 더 낳으라고 채근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 들어선 군사 정권은 소위 “3-3-33"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풀이하자면, “세 명의 자녀를 세 살 터울로 서른세 살 이전에 낳자"라는 말이다.

당시에는 이런 식의 구호가 유행했나 보다.

그 중에는 “3-3-3"이란 운동도 있었다. 하루에 세 번, 식사하고 난 후 삼 분 이내에, 삼 분간 이를 닦자는 캠페인이었다. 지금은 모두 옛날 얘기가 된 것들이다. 어쨌든, 우리 어머니도 그런 시대정신에 동참하여 세 명만 낳고 그만 낳으려고 했는데, 구시대 정신에 살고 계셨던 할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나를 낳았다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할머니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 해야겠다. 우리 할머니는 전형적인 경상도 시골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학교’를 ‘핵교’라고 부르고, ‘나무에’를 ‘남괴’라고 말했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좀 길게 깎아오면, “와(왜) 온 돈 주고 반 머리 깎아 왔노?"라고 핀잔을 주시던 분이셨다.

할머니는 글을 전혀 읽지 못했다. 심지어는 시계도 볼 줄 몰랐다.

할머니 방에는 작은 아버님이 생신 선물로 사주신 쾌종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한 번은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야야, 아무래도 저 시계가 고장이 났는 갑다. 어제 밤에 저 시계가 한 번 땡치고, 한 참 있다가 또 한 번 땡치고, 세 번이나 그카더라."

그 시계는 매 시각 중간마다 한 번씩 울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할머니는 우연히 12시 30분에서 1시 30까지 깨어 계셨는가 보다. 할머니는 평생 지독히 아끼며 살다 가셨다. 평생 좋은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시고 남루하게 지내셨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아끼는 것이 유일한 생존 비결로 아신 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에 밥알을 하나라도 남겨서 집에 가면 혼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랑에서 빈 도시락을 씻고 들어가곤 했다.


무학 할머니에게 근면,성실 배워

당시엔 학교에서 무료 급식으로 빵을 나누어 주던 시절이었다. 네모반듯한 빵이었다. 이 빵을 얻어먹으려고 일곱 살 때부터 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입학할 때는 우리 학년이 칠십 여명 되었는데, 2학년이 되니 빵 얻어 먹으러 왔던 애들은 빠지고 5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우리 학년은 6년 내내 한 반에서 배웠다. 지금 나의 아내는 6년간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친구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머리가 조금씩 튀었다. 그때부터 “착하고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 초등하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얘기해 주시던 ‘반쪽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어린이회장이 되었다. 내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초등학교를 방문해보니 이제는 아이들이 줄어 폐교가 돼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동네에 전기라는 것이 들어 왔다. 아마 1975년 늦가을 어느 월요일 저녁이었던가 보다. 우리집 마당에는 대한전선이라는 회사가 만든, 다리가 네 개 달리고 가구같이 생긴, 커다란 흑백텔레비전이 하나 설치되었다. 그 텔레비전은 브라운관 앞에 여닫이 문이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 그 텔레비전에서는 군대 행진곡같은 음악과 함께 “육탄의 용사들"이라는 드라마가 상영되었다. 당시 우리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나시찬의‘전우’라는 드라마였다.

우리들은 텔레비전에 환호했다. 그 전에는 김일의 박치기나 압둘라 부처의 16문킥이라도 보려고 하면, 이웃 동네까지 원정을 가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시국사건에 쫓기던 장기표와 만남

나는 1977년, 면 단위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 학교수업을 받는 이외에 따로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대신 책은 많이 읽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전읽기라는 게 생겨서, 신유복전이니 박씨전이라는 책들도 읽었다.

학급에 문고라는 것이 들어온 후로는 투명인간, 해저이만리, 삼총사 같은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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