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된 국내 경기 불황으로 전문 자격증에 대한 관심이 치솟고 있는 가운데 미국공인회계사(AICPA) 자격시험과 관련, 모 사립대학과 사설학원이 10여년 간 학원 수강생을 상대로 ‘학점장사’를 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스로 피해자라며 처음 문제를 제기한 김모(45)씨는 “국내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짝퉁 학점을 따느라 8개월의 시간과 노력을 허비했다”며 “M경영학원과 H대학이 부적절한 거래 계약을 맺고 수강생들을 농락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H대학은 정부 소명 자료를 통해 김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씨가 실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생떼를 쓴다는 것이다.

H대학은 지난 2006년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 이하 교과부)에 보낸 답변서에서 “교내 부설 연구소와 당시 미국공인회계사협회(AICPA) 인
가를 받은 M학원이 협약을 맺고 해당 학점을 발급했던 것”이라며 “발급된 30학점은 미국 현지에서 정식으로 인정된 만큼 문제가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10여년 간 이어진 개인과 사립대학-사설학원의 공방전을 들여다봤다.

김씨는 1999년 노동부 지원 실직자 재취업 교육 과정에 참여해 서울 M경영학원에서 미국공인회계사(AICPA) 취득과정을 수료했다. 당시 M학원은 수강생들에게 ‘본 과정을 수료하면 H대학교 명의로 발급하는 회계학 과목 30학점에 대한 성적증명서를 내주겠다’고 공지했다.


“8개월 간 공 들인 노력 물거품”

AICPA 자격시험에 응시하려면 학사이상의 학력과 일정 수준 이상의 회계·경영학 관련 학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영학 비전공자였던 김씨는 M학원을 통해 H대학 명의의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지난 2005년 불거졌다. AICPA와 응시 요건이 비슷한 한국공인회계사(KICPA)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으려던 김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M학원과 H대학이 발급한 성적증명서는 오직 AICPA 응시에만 쓸 수 있을 뿐 다른 자격시험은 물론 편입이나 취업 등 어떤 용도로도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된 것.

김씨에 따르면 M학원 출신 수강생들의 학점담당사무를 담당한 이모 H대 교수는 성적증명서 발급을 위해 직접 학교를 찾은 김씨에게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설명했다.

김씨는 “이 교수가 ‘해당 학점은 AICPA 시험 응시용도 외에는 어떤 목적으로도 쓸 수 없도록 학원 측과 계약을 맺었다’며 이 같은 사실을 미리 공지 받았다는 각서를 쓰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즉 김씨가 목표로 한 KICPA 시험을 보려면 학점은행센터에서 공인한 또 다른 기관에서 관련 수업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씨는 그 길로 M학원 원장인 황모씨에게 직접 항의하려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M학원은 이미 폐업신고가 돼있었고 황 원장은 벤처 사업가로 활동하다 수년 째 종적을 감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M학원에서 발급하던 H대학 성적증명서는 그 뒤 K학원이 발행업무를 대신 처리했다. K학원 원장 구모씨는 황 원장이 M학원을 운영하던 시절 강사로 활동했으며 회계학 관련 서적을 공동 집필할 만큼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을 안 김씨는 K학원을 찾아가 구씨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M학원과 이곳은 전혀 관계가 없다. 때문에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근엔 발급한 적 없어”

이에 대해 K학원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수년 전 구 원장이 M학원 강사로 활동한 것은 맞지만 K학원은 M학원과 하등의 법적 관계도 없는 별개의 운영단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황 원장이 수년 전 학원계를 떠나며 과거 수강생들이 혹 피해를 입을까 구 원장님에게 학점 발급 관련 사무를 대신 맡아줄 수 없겠냐는 부탁을 하셨다. 원장님은 교육자적 양심으로 발급 업무를 떠맡은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문제가 된 학점 발급 과정에 대해 K학원과 구 원장은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씨는 K학원과 H대학이 성적증명서를 발급하는 과정에도 의구심을 드러냈다. 김씨에 따르면 과거 M학원 출신 수강생들이 성적증명서 발급을 요청하면 K학원은 황 원장이 넘겨준 자료를 토대로 H대학교 직인이 찍히지 않은 증명서 양식을 넘겨주고 학생이 직접 H대학 이 교수를 찾아가 학교 날인을 받아오는 식이다.

기자는 지금도 M학원 출신 수강생들이 문제의 성적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는지 K학원과 H대학에 직접 확인해 봤다. 학점발급 담당이었던 이 교수는 지난해 정년퇴임한 뒤 정교수가 아닌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작년에 은퇴하며 M학원 관련 발급업무는 학적과에 모두 넘겨줬다. 최근에는 해당 증명서를 요청하는 학생이 없었다. 자세한 것은 K학원과 학적과에 문의하라”고 말했다.

H대학 학적과 관계자 역시 최근에는 관련 업무를 처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예전에 그런 일(학원 수강생들의 학점발급 업무)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관련 요청이 들어오거나 발급 업무를 처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의 성적증명서가 과거에는 H대학 내에서 발급됐지만 최근에는 관련 업무가 사실상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K학원은 국가공인기관인 학점은행센터에 등록된 교육기관으로서 관련 학점 이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경영학 비전공자 수강생들은 이를 이용해 관련 학점을 취득, 자격시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K학원의 경우 사립대학과의 계약이 아닌 학점은행센터의 관리감독 아래 놓여있다. 이 때문에 학원에서 취득한 학점은 시간제 수업으로 인정돼 AICPA는 물론 KICPA에도 일부 활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거 M학원 수강생들이 발급받은 H대학 명의의 학점은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또 문제의 학점을 기본 요건으로 취득한 AICPA 자격증은 유효할까.

사설단체의 시간제 수업과 학점 이수업무를 관리하는 학점은행센터에 확인한 결과 M학원은 지난 1998년부터 현재까지 단 한번도 공인 단체로 이름을 올린 적이 없었다.

M학원과 이름이 같은 교육시설이 2006년과 2007년 두 번에 걸쳐 공인 교육기관으로 인정해달라는 신청서를 낸 적은 있지만 두 번 모두 평가 기준을 만족하지 못해 선정되지 않았다.

학점은행센터 평가인정팀 관계자는 “사설 학원 수업을 정규대학 시간제 수업이나 학점으로 인정해 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며 “감독 기관인 교과부에서 판단할 일이지만 해당 학점을 이용해 국내 자격증 시험을 보거나 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이 같은 문제를 처음 제기한 김씨는 기자에게 ‘2006년 당시 교육인적자원부(현재의 교과부)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해당 학점이 무효라는 답변을 얻었다’고 말했다. 기자는 당시 김씨의 민원을 처리했던 대학지원국 학무과 정모 담당관을 통해 정확한 민원 내용과 처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정 담당관은 “민원인(김씨)에게 전화상으로 ‘현행법상 사설 학원에서 대학 학점 취득을 위한 교육행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교과부 입장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씨와 비슷한 내용의 문의와 민원이 상당히 많았다고 덧붙인 정 담당관은 관련 법규를 검토한 뒤 H대학에 소명자료를 요청해 공식 답변서를 받았다고도 밝혔다.

교과부가 접수한 H대학의 공식 입장은 이렇다. 10여년 전 H대학 부설연구소는 노동부 인가를 받아 AICPA에 필요한 학점은행을 자체 운영하는 과정에서 미국 현지 공인을 받은 M학원과 협약을 맺었다.


“문제의 성적, 국내서 통하면 불법”

M학원의 AICPA과정을 이수하면 H대학 명의 성적증명서를 발급하지만 이는 해당 시험용으로만 쓰도록 계약서상 제한, 국내 실정법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H대학의 설명이었다.

정 담당관은 “만약 문제의 학점이 편입학이나, 국내 자격증 취득 등 다른 용도로 쓰였다면 그 자체만으로 불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해당 성적증명서가 미국 현지에서도 무효인지는 미국법에 따라 판단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사용처 자체가 미국회계사 자격시험용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은 미국 현지에서 내릴 문제란 것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국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학과 성적이 국제 자격증 시험 요건에 버젓이 사용됐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