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외친 사람들 비민주적 행태에 실망

다시 재수 시절 얘기로 돌아가자. 그 해 5월 어느 날, 나는 학원을 그만두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갔다. 여름 내내 시골집에서 농사일이나 도우며 지냈다. 보리타작도 하고 모내기도 했다. 물론 농약 치는 것도 거들었다.

시골의 우리 집 사랑방에는 돌아가신 큰아버지께서 보시던 사상계라는 잡지가 보관되어 있었다. 서가에는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말까지 백여권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기 구독한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돌팔이 의사에게 허리에 침을 잘못 맞아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내셨다. 이른바 ‘누운뱅이’였다.


사상계 소각 사건

그래도 그 분은 시골에서는 꽤 유식했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평생 사상계를 통해 세상을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 읽은 횟수를 표시한 것인지, 기사마다 빨간 인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놓았다. 어떤 기사는 동그라미가 예닐곱 개나 되는 것도 있었다.

사상계에는 한국 논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함석헌 선생의 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읽을거리가 많았다. 새로운 사상조류를 소개한 글들도 좋았고 소설을 읽는 맛도 짜릿했다.

사상계 얘기는 좀 더 해야겠다. 나는 대학 들어가고 난 후에도 사상계를 끼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 시골집에 있던 사상계를 아예 서울로 가지고 올라 왔다.

그런데 일백 권이 넘는 잡지를 보관하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은데다, 퀴퀴한 책 냄새도 만만치 않았다. 이사 다닐 때마다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이 사상계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어떻게든 없애야 했다.

나는 봉천동의 국사봉 꼭대기에 살던 90년 초, 이 사상계를 집 옆의 공터로 가지고 나가 모두 불태웠다. 그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 이념과는 결별이다"고 생각했다. 그 잡지는 큰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우리 집의 가보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없앤 게 너무 아쉽다. 사상계가 꽂혀있던 서가 한켠에서 나는 1960년 4월 혁명기의 동아일보 한 뭉치를 발견해 냈다.


‘아우의 죽음’ 충격

아마 큰아버지께서 사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소중히 보관했던 모양이다. 나는 누렇게 변색된 신문 종이에서 4월 혁명의 피냄새를 맡았다. 이 신문뭉치와 함께 1960년 5월에 발행된 사상계 4월 혁명 특집호를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책에는 서울대 법대 강사라고 소개된 김치선이란 분이 쓴 ‘아우의 주검 앞에서’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다. 그 글은 4.19 의거에 나섰다가 경찰의 총격에 숨진 아우를 기억하며 쓴 글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그야말로 피가 끊었다. 그 때 ‘서울대에 들어가면 김치선이란 분을 한 번 만나보리라’고 마음먹
었다.

나중에 법대에 들어가서 보니 김치선 교수님은 법과대학 학장이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갓 들어온 얼치기 운동권 학생이었는데, 그 분은 실망스럽게도(?) 학생들의 데모를 적극 만류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대 재학 중 관악 캠퍼스 안쪽 구석에 있던 4.19 기념공원에 들러 그 아우의 기념비를 참배하곤 했다.

다시 재수 시절 얘기다.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현듯 다시‘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감만동에 살던 누님 댁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학원에 복귀하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이미 진도도 맞지 않아 독서실에서 혼자서 공부했다. 시험까지 약 3개월간 그야말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그 당시에 안성탕면이 처음 나온 시절인데, 독서실에서 끊여 먹던 그 라면 맛은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치른 83년 입시에서는 점수가 그런 대로 나왔다. 서울대 법학대학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나는 84학번이다.

대학 생활은 처음부터 잘 적응하지 못했다. 번잡한 서울도 혼란한 학교도 재미가 없었다. 시골에서 올라 온 촌놈에게는 서울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학원자유화 조치를 시행한 직후였는데, 학원 소요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녹화사업에 끌려갔던 선배들이 복학하면서 학생운동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던 시절이었다. 학도 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회가 재조직되었다. 아크로 광장에는 거의 매일 수 천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데모를 했다.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무했다.

학생회관 주변에는 언제나 대자보가 빽빽이 나붙었다. 복학생협의회 대표이던 유시민 선배가 대자보를 붙이는 날이면 (물론 대자보의 저자는 누군지 밝히지 않았지만 우린 대충 알았다) 넋을 읽고 쳐다보던 시절이었다.

그 땐 유시민씨가 글을 잘 썼다. 87년인가 그가 구속되고 난 후 쓴 항소이유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많이 타락(?)한 것 같다.

나는 수업에 빠지는 날이 점차 늘어났다. 혼자서 이념서적을 탐독하는 시간이 많아 졌다.

특히 세계의 모든 혁명과 혁명가들에 대해 많이 읽었다. 한길사에서 펴낸 함석헌 전집도 거의 다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수준이지만 그땐 꽤나 진지하게 읽었다.

그러면서 나의 사고는 급속히 좌편향으로 변해 갔다.

나는 이른바 이념서클이라는 데는 가입하지 않았다. 고전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 문턱까지는 갔지만 결국 참여하지는 않았다.

선배란 사람들이 가르치려 드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화를 외치면서 스스로는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였다. 자칫 잘못 발을 담궜다가 영원히 신세를 조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진정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쉽게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고 변명했다.


유시민에 대한 단상

법과대학 1학년 1학기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성적표가 온통 시들시들(C, D)했다. 푸들푸들(F, D)할 뻔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시 학칙으로는 두 학기 연속 학사경고를 받으면 퇴학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2학기에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점 격렬해지더니 집단으로 중간고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시험을 거부하면 퇴학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친구들이 “1학기 때 경고 받은 사람들은 시험장에 들어가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휴학을 택했다. 이 때 시작한 휴학으로 인해 그 후 대학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는 시절이 이어졌다. 이러다 보니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데 무려 9년이 걸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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