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살 의도’ 도대체 무엇일까?

현대 아산병원에서 치뤄진 고 박왕자씨 영결식.

금강산 관광을 떠났다 총격으로 사망한 고 박왕자(53·여)씨가 북한군에 의해 의도적으로 사살됐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돼 파문이 예상된다. 지난 16일 발표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공식 부검 결과 박씨가 멈춰 있는 상태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을 가능성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여기에 “북한군 내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한 발포는 반드시 상부 명령이 필요하다”는 북한군 출신 탈북자의 증언도 나왔다. 이 같은 정황을 놓고 본다면 북측이 처음부터 박씨를 사살할 목적으로 총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북한군부가 상당부분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박씨가 숨진 지 5일 만인 지난 16일 시신을 부검한 국과수의 공식 브리핑이 세종로 정부청사 별관에서 열렸다. 하지만 그동안 제기된 핵심의혹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전혀 없었다.

국과수 서중석 법의학부장은 “현장 조사 없인 정확한 발사거리 추정이 불가능하다. 가슴과 엉덩이 중 어느 쪽이 먼저 총에 맞았는지, 박씨를 쏜 초병이 몇 명인지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국과수 발표는 단순히 박씨가 두 발의 관통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결론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등과 엉덩이, 어느 쪽 먼저 맞았나

그러나 부검 결과 가운데 북측 설명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총탄 흔적이 나와 궁금증이 더욱 커지고 있다. 먼저 박씨가 입었던 흰색 셔츠와 검은색 원피스에 생긴 총알 자국이 정확히 몸의 상처와 일직선으로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박씨가 적어도 총에 맞을 때 옷이 휘날리지 않고 몸에 착 붙은 상황이었다는 것. 즉 박씨가 총에 맞을 당시 뛰어서 도망친게 아니라 걸어가거나 멈춰 선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에 맞은 총탄이 갈비뼈를 부수고 관통했다는 점도 박씨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피격됐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국과수 서 부장은 “사건 전날 1km 거리에서 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건 말이 안 된다”며 “유효사거리 내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동조사단도 박씨가 100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피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등과 엉덩이 중 어느 곳을 먼저 맞았느냐는 점이다. 북한 측 주장대로 도망치는 박씨를 제지하려는 목적으로 사격했다면 먼저 하반신을 겨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총탄은 박씨의 양쪽 엉덩이를 일직선으로 뚫고 나왔다. 박씨의 등 뒤가 아니라 옆쪽에서 쐈다는 얘기다.

그러나 초병이 박씨의 상체를 먼저 노리고 총격을 가했다면 북한 측의 설명이 일정부분 맞아떨어진다. 뒤를 쫓던 북한군이 박씨의 상체를 노려 조준사격을 가했고 총탄에 맞은 박씨의 몸이 반동으로 비틀거리는 순간 두 번째 사격이 가해졌을 가능성이다.

만약 그렇다면 북한이 처음부터 박씨를 죽일 목적으로 총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저항하지 않은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파문이 일 전망이다.

박씨의 몸을 관통한 총탄은 약 5.5mm 크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조사단은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박씨를 피격한 총기가 AK74계열(총탄 규격 5.45mm x39)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북한 일선 부대에선 AK74의 복제품인 88식 보총을 개인화기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8식 보총의 유효사거리는 약 500m. 하지만 우리 측 목격자 주장대로 두발을 쏴 모두 명중시키려면 적어도 100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특급 사수만이 가능하다는 북한군 출신 인사의 증언이 나와 새로운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북한전문 인터넷 매체 ‘데일리NK’에 따르면 박씨를 살해한 북한군은 군사 시설을 지키는 일반 초병이 아닌 ‘민사행정경찰대(민경부대)’에서 차출된 ‘금강산경비대(경비대)’ 소속 특수군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경부대 출신으로 2002년 DMZ를 통해 귀순한 주성일씨는 지난 15일 이 매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같이 말했다.

주씨는 “사건 당일 박씨를 피격한 것은 북한 초소의 일반 초병이 아니라 야간 매복 중이던 민경부대 출신 경비대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며 “민경부대는 ‘방어’라는 개념이 없고 유사시 ‘즉각 대응’을 위해 최소 전투 단위를 보통의 2인1조가 아닌 ‘3인1조’로 편성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최초 목격자인 이인복(23·경북대)씨의 “숲에서 3명의 군인이 나와 박씨를 흔들었다”는 증언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주씨는 또 “일반 보병은 ‘공포탄 경고’를 거쳐야 실탄 사격을 시작할 수 있지만 경비대는 이를 생략하고 바로 실탄을 쏠 수 있는 수칙이 있다”고 말했다.

목격자들이 단 두발의 총성밖에 듣지 못했고 박씨의 몸에서 두 군데 총상이 발견된 점도 주씨 주장에 신빙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박씨, 특수군에 사살됐을 지도”

그는 인터뷰에서 “만약 북한이 특정한 목적에 따라 남쪽 민간인에 대한 체포나 구금, 처형 등이 필요했다면 금강산 관광지가 최적지였을 것”이라며 “금강산 관광지에는 사상적·기술적으로 북한 최고 정예군이 포진해 있고 관광객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 17일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진상조사 및 재발방지와 관련한 북의 협조 정도에 따라 개성관광을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양호 통일부 차관은 민주당 금강산사건대책반 회의에서 “개성관광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남북관계가 심각해질 수 있으므로 확실한 안전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재발방지 대책이 없고 조사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개성관광도 심각하게 생각해달라고 현대아산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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