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마 살인’보다 치밀한 계획범죄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화면

지난달 22일 강원도 동해시청에서 일어난 여성 공무원 살인사건의 범인 최모(36)씨가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치밀한 계획 아래 범행을 저지른 정황이 드러나 귀추가 주목된다.

사건 직후 경찰에 붙잡힌 최씨는 살해 동기에 대해 “세상이 살기 싫어 죽였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범행을 전형적인 ‘묻지 마 범죄’로 포장한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최씨의 행적과 흉기 준비 과정 등에서 이번 사건이 철저하게 계획된 범죄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 수사팀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잘나가는 대기업 사원이었던 최씨가 방화에 살인까지 저지른 중죄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년. ‘세상이 싫고, 사람이 싫어’ 죄 없는 피해자를 난도질했다는 최씨의 주장엔 석연찮은 구석이 적지 않다. ‘비정한 살인마’의 진짜 범행 의도는 무엇일까.

사건의 진상을 들여다봤다.

대낮에 관공서 민원실에 들어가 근무 중인 공무원 남모(37·여·기능9급)씨의 머리와 가슴을 난도질해 살해한 혐의로 지난달 23일 구속된 최씨. 그가 밝힌 범행 동기는 ‘세상이 살기 싫어 교도소에 가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또 다른 동기를 캐묻는 수사관들에게 “다른 대답을 원하는 것 같은데… 징역이나 가려고 죽였다”며 태연하게 대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한 범행 동기나 목적 없이 눈에 띈 시청 건물에 뛰어들어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몇 가지 정황들은 최씨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치밀하게 이번 범행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범행 흉기, 하루 전 마련

먼저 그가 범행 당시 사용한 흉기를 구입한 과정이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범행 하루 전 근처 잡화상에서 회칼과 등산용 나이프 두 자루를 구입해 보관했다.

그는 사들인 흉기들을 각각 신문지에 싸 뒀으며 이 중 한 자루가 피해자를 살해하는데 쓰였다.

또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최씨가 범행 이틀 전 살던 원룸의 보증금을 뺀 뒤 시청 근처 모텔에서 생활했다는 점이다.

경찰은 이 같은 사실들로 미뤄 용의자 최씨가 적어도 이틀에 걸쳐 범행에 사용할 흉기와 범행 장소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답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씨는 구체적인 범행 동기를 추궁하는 수사팀의 질문에 끝내 함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큰 건물에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해 들어가 아무나 살해하려고 했다”며 의도적으로 시청 공무원을 범행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는 또 “사는 것이 힘들었다. 먼저 말한 것이 전부고 대답할 것도 없다”며 “다른 내용의 자백을 원하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는 없다. 반복된 얘기지만 세상사는 게 힘들어 징역이나 살려고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 뒤 입을 다문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범행 당시 흉기에 찔려 실신한 피해자를 수차례 난도질해 확인 살해 할 만큼 원한에 차 있었다. 그럼에도 뚜렷한 동기조차 밝혀내지 못한 것에 수사팀은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동해 경찰서 관계자는 “최씨가 조사를 받는 동안 한 치의 떨림도 없이 태연하게 범행 상황을 묘사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며 “교도소에 가기 위해 모르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동해경찰서 관계자에 따르면 사건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힌 용의자는 줄곧 명료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경찰수사에 응했다.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최씨의 태도가 차분하고 논리적이라는 것.

하지만 최씨의 끔찍한 범행은 이미 2년 전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2006년 11월 부산 사상구에 있는 전자제품 대리점에 불을 질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과자였다.

이 때 불탄 상점은 최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다. 다만 용의자는 자신을 해고한 회사에 대한 앙갚음으로 회사 로고를 내 건 대리점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모 대기업 경남 지사에서 근무하던 최씨는 2003년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고 한순간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는 최근까지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고 앙심, 2년 전엔 불장난

전문가 사이에서는 법원 판결에 의해 전과자 낙인이 찍힌 최씨가 공무원에 대한 악감정을 키워오다 일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표창원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전에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불만을 해소함에 있어 관공서가 크고 무서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며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쏟아내는 대상이 최근 국가 재산, 공무원 등으로 옮아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 동해시 공무원 노조가 직원들의 근무안전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노조는 이번 사건이 대낮에 많은 직원이 함께 근무하던 중 일어난 점에 주목하고 있다. 비교적 인적이 뜸한 밤 시간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더 자주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에 노조는 동해시와 민원업무 직원들의 퇴근 시간 후 대기 근무를 중단, 조합원들의 근무 안전도를 높이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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