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기자] 연극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가 지난 125일부터 20151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연극열전5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기대감을 갖고 연극을 기다리는 게 당연하지만,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의 기대감은 특별한 궁금증 같은 것들이 더해진다. 2013년 토니 어워드 최고 작품상, 뉴욕 연극비평가협회 최고 작품상,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 작품상 등 9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 이렇게 빨리 한국 초연을 연다는 것과 연극 관계자의 직접적인 추천이다. 일부러 재미있는 공연이니까 찾아가 관람하면 좋겠다는 추신은 사실 연극 관계자들에게 자주 들을 수 있던 내용은 아니다.
 
160분의 연극은 색체 선명한 무대디자인처럼 시종일관 흐뭇하게 그리고 훈훈하게 흘러간다.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익숙한 명언을 어느 틈에 전한다. 등장인물 바냐는 60년 가까운 일생 동안 이룬 것이 없다는 쓸쓸함과 단절된 작금을 납득하지 못하고, 입양된 소냐는 치매가 걸린 양부모님을 간호하느라 외딴집에 묶여 있다가 우울증에 걸리며, 마샤는 영화판에서 한물간 여배우로 보이고 싶지 않아 몸부림친다. 등장인물들이 처한 생활 스트레스 혹은 위기감은 웃음과는 거리가 먼 현실 공감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창조적이고 유머러스한 대사와 연출이 초반부터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극 후반부에 인물들이 표면적으로 제시하는 메시지는 역시 희망이지만,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에 엿보이는 그 희망을 위한 시작, 배경은 살짝 남다르다. 이 연극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서로간의 경청과 칭찬이다. 이는 캐릭터 간의 대화마다 드러나며, 상황 상 다른 인물을 무시하는 장면에서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알아봐주길 바라는 외로움이 들어있다. 캐릭터간의 교감과 심리까지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캐스팅된 배우들의 호흡 덕이다.
경청과 칭찬이 가장 돋보였던 장면은 1막에 있다. 초짜배우 스파이크가 연상 여자 친구인 마샤 등의 권유로 오디션 연기를 재현한다. 이를 보기위해 가족들과 손님 니나까지 거실에 앉아 어떤 행복감 혹은 각자의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 순간 연말에 꼭 어울리는 따뜻한 가족 이미지가 연상된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반짝이는 선물 상자에 둘러싸인 미국 어느 가정의 연말 이미지는 누군가에 따라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데, 이 장면은 그저 타인에 집중하고 표정을 담아 북돋아주는 것이 전부다. 물질이 없는 따뜻함이다.
그리고 2막에서는 1막 스파이크 오디션 재현의 소중함을 더 강조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희망의 중요한 시작이라는 것을 전하는 장면이다. 바냐가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인 희곡의 수줍은 낭독을 스파이크가 개인 취향차이, 스마트 폰 알람을 핑계로 외면한 것. 바냐는 희곡 낭독을 중단하고 그동안 쌓아뒀던 현대 인간성의 단절과 무의미한 복잡함을 토로하고 외친다. 그리고 1950년대 미국에 존재했던 끈끈한 유대감 등을 그리워한다. 현실에 뒤쳐진 과거 세대만이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냐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진행은 해결점을 제시한다. 소통 안에서 인물들은 새로운 터닝 포인트, 무기력감과 열등감 극복을 향해 나아간다.  소냐, 마샤에 줄곧 나타나는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존재감 발현의 욕구 역시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통해 해소될 가능성을 연다.
 
바냐 역의 배우 서현철은 때로는 체념하고 때로는 배려하는 힘 빠진 연장자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보였고, 마샤 역의 서이숙은 무르익은 목소리로 경쟁과 자존심에 죽고 사는 영화배우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소냐의 황정민은 영화 밍크코트의 명연기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순수한 인물을 밝게 연기해 중심을 잡아줬다. 스파이크 역의 김찬호, 니나 역의 김보정, 카산드라 역의 임문희 또한 각자의 내공을 십분 발휘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들 유명 연극, 뮤지컬에서 주연을 맡았던 친근한 배우들이다.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는 안톤 체홉의 오마주이기 때문에 안톤 체홉 문장의 인용이 많다. 그의 작품을 아는 관객이라면 추가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만, 반대로 이번 연극을 보고 안톤 체홉의 작품들을 관람 한다면 그 재미가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안톤 체홉의 젊은 시절 숨겨진 작품들의 초연부터 4대 명작 등 많은 작품이 공연된 해이기도 했다.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의 매력을 안톤 체홉의 문장과 희곡에서 찾아보는 것도 괜찮은 시도일 듯싶다. 이번 연극의 프로그램북을 통해서도 안톤 체홉과 극중 거론된 미국의 1950년대 문화를 자세히 얻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길 바란다.
 
줄거리-
유식한 대학교수 부모님으로부터 안톤 체홉의 연극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선물 받은 바냐소냐마샤남매. 평화롭지만 그만큼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년의 백수 바냐와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보이는 중년의 노처녀 소냐에게 왕년의 섹시스타 마샤가 젊고 섹시한 애인을 대동하고 찾아온다. 결혼은커녕 변변한 연애조차 못한 소냐앞에 5번이나 이혼하고 이제는 젊은 애인 스파이크까지 데리고 나타난 밉상 마샤는 심지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팔겠다고 선언한다. 심란한 바냐와 소냐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샤는 코스튬 파티를 가자며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의상을 펼쳐 보이고 그 와중에 스파이크는 예쁜 옆집 아가씨 니나를 데려와 마샤의 신경을 긁는다. 그리스 예언자 이름을 가진 청소부 카산드라가 아침부터 쏟아내는 불길한 예언 속에순탄치 않은 하루를 보내는 이 가족, 과연 하루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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