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본인의 공약을 자기 손으로 취소해도 되나?”

▲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박 시장 “동성애 지지 안 한다”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
 “우리 곁에 있겠다더니…” 실망감 드러내는 지지자들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서울시가 야심차게 추진한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제정이 끝내 무산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 포함 여부에 대한 반대여론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서울시는 전원합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성소수자 모임과 시민단체, 서울시인권위는 서울시에 인권헌장을 선포하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성소수자를 외면한 박 시장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박 시장이 사과를 했지만 비판 여론은 여전히 거세다. 박 시장을 지지했던 시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6월부터 안전, 복지, 교육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에서 서울시민이 누려야 할 인권적 가치와 규범을 담은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제정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일반시민과 전문가 등 180명으로 구성된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가 인권헌장 초안을 만들기 위해 시민들과 토론회를 개최했다. 더 많은 서울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인권헌장 제정은 쉽지 않았다. 인권헌장에 동성애 합법화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며 보수단체와 종교단체에서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동성애자 인권보호는
치료와 회복을 위한 지원”

이들은 인권헌장 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집회를 열고 동성애 합법화 반대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대다수 시민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박원순 시장이 동성애 조항을 끝까지 강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소수자 인권 옹호라는 미명으로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며 “동성애자들을 위한 진정한 인권보호는 동성애자의 치료와 회복을 위한 지원에 힘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20일 예정됐던 ‘서울시민 인권헌장(안) 공청회’도 반대 시민들의 항의로 개최되지 못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조항은 인권헌장 제1장 제4조다. 이 조항은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중략)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의 1안과 ‘서울시민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의 2안으로 구성돼 있다. 이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인권헌장을 제정하는 것은 동성애 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라면서 반대의 뜻을 밝혔다.

결국 이런 논란 끝에 인권헌장 제정은 무산됐다. 지난달 28일 시민위원회는 마지막 전체회의에서 제1장 제4조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했다. 일부 위원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퇴장했으며, 결국 180명의 시민위원 가운데 73명만 남아 표결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압도적으로 1안이 선정됐다. 그러나 서울시는 재적 과반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이를 합의로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인권헌장을 확정하지 않았다. “시민위원회는 과반수출석이나 과반수찬성의 의결방식을 택한 적이 없다”는 시민위의 반발에도 서울시는 꿈쩍하지 않았다.

“성소수자 인권 앞장 선
박원순 어디 갔나”

성소수자 단체와 여성단체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금지는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며 인권헌장 선포를 촉구했다. 시민위원회에서 합의된 사안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다 지난 1일 박 시장이 서울시청에서 열린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과의 간담회에서 “(인권헌장으로 인해)사회갈등이 커지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자 성소수자 차별반대 단체인 무지개행동과 무지개 농성단은 박 시장에게 해당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시청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지난 6일 서울시청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와 박 시장이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찬성과 반대가 가능한 문제로 전락시켰다”며 “우리는 한국사회 인권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 앞에 더 이상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농성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박 시장은 서울시민 권리헌장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그럼에도 극우 기독교 세력 앞에 성소수자의 인권을 내동댕이치고 시민의 힘으로 제정된 헌장을 둘러싼 논란을 사과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또 “박 시장은 소수자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비난했다. 진보단체들도 성소수자 차별 반대에 힘을 더했다. 13개 진보단체로 구성된 ‘인권시민사회’는 “성소수자의 인권이 사회적 논란이 아니라는 것을 인권변호사 출신인 박 시장이 모를 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인권헌장 무산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박 시장은 지난 10일 인권단체 대표들을 만나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날 박 시장은 “좀 더 신중하고 책임 있게 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고 논의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이번 일로 인해 내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은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이어 “인권헌장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사회적 협약이자 약속인 만큼 서로간의 합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앞으로 더 어렵고,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상호신뢰 원칙을 가지고 논의와 소통의 장을 계속 열고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6일 동안 시청 로비를 점검하고 있던 성소수자 단체는 박 시장의 사과 이후 “우리의 요구와 싸움은 계속돼야 한다”고 밝히면서 시청 점거농성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인권은 찬반 문제 아니야
표 위해 인권 버렸나”

그러나 박 시장을 향한 비판 여론은 여전히 뜨겁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박 시장의 공약이었다. 거기에 우리사회에서 동성애 차별 반대를 외쳤을 때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또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 시장은 예상 가능했던 일 때문에 본인의 공약을 자기 손으로 취소한 것이라는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러다보니 보수·종교계의 ‘표’를 잃지 않기 위해 성소수자의 ‘인권’을 버린 것 아니냐는 비난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을 바라본 김모(34)씨는 “인권은 찬반의 대상이 아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박 시장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면서 “박 시장도 결국 일반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많은 종교인들의 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성소수자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일에서 박 시장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진 이유는 인권헌장 무산보다 박 시장의 행보였다. ‘우리(시민)곁에 있겠다’고 말했던 박 시장은 이번 인권헌장 무산 과정에서 성소수자의 곁에 없었다. 박 시장은 면담을 요구하는 성소수자 단체를 외면했다. 영하의 추운날씨에 시청로비에서 농성하는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농성장을 강제 철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다 비판 여론이 계속되자 농성 5일째 되던 날에야 인권단체 대표들을 만났다. 이에 농성에 참여한 성소수자 A씨는 “우리는 기다렸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시민들과 소통하던 시장님은 어디에도 없었다”며 “심지어 한파가 휘몰아치던 저녁 농성장에 전기마저 끊어버렸다”고 말했다.

이번 인권헌장 무산 과정을 지켜본 시민들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면목동 주민 신모(31)씨는 “내가 알던 시장님이 아니라 충격을 받았다. 인권변호사 출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라면서 “가방 하나 메고 시민들을 만나던 그 분이 맞는가?”라고 말했다. 잠실에 사는 이모(28·여)씨도 “인권헌장 폐기까지는 이해하려고 했다”면서도 “그러나 시민들과 만나서 대화도 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했다. 농성장 철거하고 전기 끊는 시장님은 내가 지지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신림동에 사는 정모(39)씨도 “소통할 줄 아는 시장님인 줄 알았는데 잘못 알았던 것 같다”면서 “너무 실망스럽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이번일은) 실망했지만 앞으로 지켜보겠다”고 말하는 시민들도 많다. 앞으로의 박 시장의 행보가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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