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發 정계개편 시나리오

▲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與 친이계, 자원외교 국정조사에 부글부글
野 2월 전당대회 앞두고 ‘빅3 불출마’ 요구
김부겸·안철수 3지대 신당론도 불씨 여전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2015년은 박근혜 대통령 5년 임기 중에서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유일한 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정운영에 강한 드라이버를 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선거를 제외한 정치상황은 녹록치 않다. 특히 여의도 정가에선 선거가 없는 내년에 2016년의 20대 총선을 대비한 정치권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란 괴담이 무성하다.
이런 관측은 여권은 여권대로, 야권은 야권대로 정계개편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무수히 안고 있다는 상황분석에서 시작된다.

#1. 여권 발 시나리오

12월 18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식당.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새누리당 친이계 전·현직 의원들과 MB 시절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MB를 맞았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과 이군현 사무총장, 권성동·김용태·조해진 의원, 권택기 전 의원 등의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참모 출신 중에는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이 MB를 영접했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나왔다, 식당에 모인 사람은 모두 28명이었다.

친이계의 좌장인 이재오 의원이 마련한 이날 만찬은 MB의 생일이자 대통령 당선일, 결혼기념일이 겹치는 12월 19일을 하루 앞두고 열렸다. 친이계의 송년 만찬 성격도 띠었다.

그러나 이런 의례적인 의미 외에도 이날 만찬은 각별한 뜻이 있었다. MB 정부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자원외교에 대해 여야가 국회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한 이후에 친이계가 대규모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MB는 식당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이 ‘국정조사 증인으로 채택되면 출석할 것이냐’고 묻자 “구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추정해 얘기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국회에서 하는 일이지. 나에게 물으면 되느냐”고 덧붙였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말투에선 상당한 불쾌감이 묻어났다.

비공개로 진행된 만찬에서 MB는 내년 1월 말께 출간할 회고록의 내용에 대해 “그동안 일을 같이했던 분들과 하나하나 정리했다. 책이 나오면 아마 좋은 역사적·사회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회고록에선 자원외교의 필요성과 성과를 길게 나열하면서 총체적 실패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원외교 국정조사는 신-구 정권의 갈등을 촉발시키며 여권 발 정계개편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뇌관이란 분석이 많다. 실제로 새누리당이 국정조사 실시를 결정하는 데는 김무성 대표가 사실상 뒤로 빠진 상태에서 친박계 핵심인 이완구 원내대표가 주도했다. 당연히 당내에 남아 있는 친이계가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다. 친이계 일각에선 “이번 기회에 친박계와 갈라서자”는 강경론도 나온다.

친이계가 박근혜 정부와 결별을 준비하고 있다는 다른 심상치 않은 조짐들도 있다. 친이계 핵심인 정의화 국회의장과 이재오 의원의 ‘박근혜 대통령 때리기’다.

정 의장은 연일 박 대통령의 ‘불통’을 비판하고 있다. 지난 15일 정홍원 국무총리와 최경환 경제부총리, 황우여 사회부총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선 “(대통령이) 정상외교를 하고 난 뒤에는 최소한 3부 요인이나 5부 요인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셔야 한다. 국회의장의 위치에서 신문지상 보도만 갖고 (인지)한다는 것은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재오 의원의 박 대통령 비판은 더욱 노골적이다. 결별을 예고하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특히 이 의원은 새정치연합 중진인 이해찬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도 박 대통령을 거칠게 공격해 참석자들이 의아해 할 정도였다.

이재오 의원은 지난 11일 이해찬 의원이 국회에서 연 토론회에 나가 축사를 통해 ‘정윤회씨 국정개입’ 보고서 논란과 관련, “사람이라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는 해야 한다. 이런 게 없는 것이 제왕적 대통령의 적폐”라며 박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심지어 ‘유신독재’라는 단어도 썼다. 이 의원은 “현 정권이 옛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 그중에서도 유신독재 권력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여당 중진의 말인지, 야당 중진의 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이재오 의원의 ‘유신독재론’→정의화 의장의 ‘불통론’→친이계의 대규모 회동 같은 기류를 감안하면 MB 진영이 독자생존의 수순으로 접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특히 자원외교 국정조사 과정에서 친박계가 MB의 직접 출석에 동조할 경우 친이계가 거세게 반발하면서 집단 탈당을 모색할 수도 있다. 친이계 한 인사는 “비선 라인 국정농단 의혹으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굳이 함께 갈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황 평론가는 “친이계가 독자생존을 모색한다면 아마도 그 연결고리는 이재오 의원이 전도사로 나서 있는 ‘개헌론’이 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2. 야권 발 시나리오

“야권구도가 지금처럼 가선 정권재창출의 길은 아득하다. 심지어 20대 총선까지도 지금의 새정치연합 체제가 그대로 가면 공멸할 우려가 있다. 텃밭인 호남도 마찬가지다. 뭔가 특단의 방향 전환, 진로변경이 없으면 진보 진영의 미래도 없다.”

최근 필자와 만난 새정치연합 중진 의원의 말이다. 그는 “특히 호남주민들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여전하다. DJ 정신을 계승할 정치세력의 태동을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호남 정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한 셈이다.


호남 정당에 대한 욕구 외에도 새정치연합에선 정계개편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수요’가 넘쳐난다.

무엇보다 내년 2·8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양한 욕구들이 분출되면서 또다시 ‘계파패권주의’가 판을 치는 모습이다. 크게 친노와 비노로 갈라진 계파패권주의가 전당대회라는 용광로에 녹아들지 못할 경우 각 계파가 새누리당의 친이계처럼 독자생존을 모색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당 분열의 가장 큰 변수로 등장한 건 ‘빅3 불출마론’이다.

이른바 '빅3'로 불리는 문재인·박지원·정세균 의원은 지난 17일 비대위원직에서 동반사퇴하면서 당권 도전 채비를 마친 상태다. ‘빅3’의 벽을 허물 다크호스로 지목됐던 김부겸 전 의원은 같은 날 사실상 불출마 뜻을 밝히면서 3파전 구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나 ‘빅3’가 순탄대로를 걷지는 않을 전망이다. 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일부 의원들이 세 사람 모두 2선으로 퇴진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까닭이다. 특히 비노계를 중심으로 “현재의 ‘빅3’ 구도가 고착돼선 안된다”며 ‘제3의 후보론’을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논쟁이 확산되면 야당 안에서 세대갈등으로 번질 소지마저 배제할 수 없다. 한 때 제기됐던 ‘40대 기수론’의 연장선상이다.

물론, 새정치연합 안에선 친노와 비노가 딴 살림을 차리면 양쪽 모두 군소정당으로 몰락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지금의 계파 갈등을 봉합하고 가야한다는 견해도 많다. 다만 전당대회를 20일도 채 남겨놓지 않은 시점까지 경선룰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봉합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들어 야권 발 정계개편 시나리오에 또 하나의 가능성이 더해졌다. 통합진보당이 지난 19일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결정에 따라 당 자체가 없어져버렸고, 소속 의원 5명도 모두 금배지를 잃게 됨에 따라 자구책을 모색해야 할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통진당은 당이 사실상 공중분해되면서 체계적인 저항은 고사하고 당장 향후 진로를 설정해야 한다. 헌법 규정에 따라 해산심판을 받은 정당은 같은 당명의 대체정당을 재창당하지 못하고, 강령이 유사한 성격의 정당도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제 3의 길을 찾아 생존해 나가야 한다. 이런 특성이 향후 정치판의 지각변동에 변수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통진당 이정희 대표는 헌재 결정 직후 “오늘 저는 패배했고 역사의 후퇴를 막지 못한 저에게 책임을 물어달라”면서도 “그러나 저희 마음속에 키워온 진보정치의 꿈까지 해산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저항투쟁과 함께 기성 정치판에서 살아남아 진보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겠다는 의미다.

우선 가능한 시나리오는 재야인사들이나 시민사회단체와의 결합을 통한 생존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제도정치권에 재진입 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통진당과 한 뿌리였던 정의당이나 새정치연합 안의 우호세력과 연대를 도모할 가능성이 높다.

새정치연합의 친노-비노 세력 모두 통진당에 부정적이었다. 통진당의 색깔이 묻을 경우 새정치연합의 정체성까지 모호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친노-비노 프레임에도 속하지 못한 의원들 가운데는 통진당에 우호적인 인물도 있었다. 통진당이 지난 17일 주최한 정당해산반대 원탁회의에 새정치연합에선 정동영 고문을 비롯해 이미경 전 의원과 우상호·정청래 의원 등이 참석하기도 했다.

#3. 제 3지대 시나리오

한 때 야권을 중심으로 나돌았던 ‘제 3지대 신당론’도 완전히 폐기된 시나리오가 아니다. 특히 새정치연합 김부겸 의원이 전당대회 출마를 사실상 접어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김 전 의원은 지난 17일 기자간담회에서 “2년 전 대구로 출마할 때 한국정치에 가장 고질적인 암 덩어리인 지역주의를 당장 못 깨더라도 균열을 한 번 내보자는 과제를 설정하고 내려갔다. 반드시 균열내야 할 지역주의 과제가 아직 남아 있고, 전당대회 출마 준비도 충분하지 않아서 불출마하는 쪽으로 정리했다”고 밝혔다.

그는 평소 당내 계파패권주의를 강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에 이를 명분으로 독자 노선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 전 의원 본인은 다음 총선에서도 새정치연합 간판으론 대구에서 당선이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새정치연합 안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는 안철수 의원 세력, 독자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노회찬 전 의원 등과 제 3지대 창당 논의를 이어갈 여지가 충분하다. 제 3지대 창당론의 명분은 ‘중도 진보 정당론’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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