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세습병’ 악습 끊어야

▲ 정대웅 기자
세습 경영 단점은 총수들 감시하고 견제할 사람 없다는 것
 2·3세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업적 냉정한 평가 필요

[일요서울|오두환 기자] 우리나라는 세습사회다. 그 역사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우리 사회 속에 ‘세습’이라는 병이 자리 잡아 왔다. 결국 이 ‘세습병’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의 근간을 좀먹게 만들었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터지지 않았어도 언젠가 어떻게든 세습병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오히려 조씨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세습병’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 환부를 도려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세습사회 속의 세습병은 필요악과 같은 존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습병을 욕한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세습병은 항상 부정과 부패라는 합병증을 갖고 다닌다는 점이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분야든 상관없이 이 합병증은 늘 잠재돼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커나간다. 연륜은 쌓일수록 좋다. 하지만 고인물은 언제든 썩기 마련이다. 필요하다면 고인물도 퍼 내고 새로운 연륜을 쌓아야 한다.

고인물은 언제든지
썩기 마련

우리나라에서 세습병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먼저 경제계를 살펴보자. 국내 10대 대기업 중 세습으로 그룹의 총수가 되지 않은 경우는 하나도 없다. 물론 세습에 의한 그룹 운영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중국과 일본 등은 이제 탈 세습 경영을 시도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오히려 더욱더 견고해지는 분위기다.

재벌 세습경영의 단점은 총수들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이번 대한항공 사태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 뿐만 아니다. 견제를 받지 않다보니 회사의 재산은 물론 기업의 이익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거나 빼돌릴 위험성도 높은 게 사실이다. 실제 국내 일부 대기업 CEO들은 이런 문제들로 인해 구속되기도 했다.

세습경영을 하는 기업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무기로 세습경영을 정당화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그룹 회장의 아들, 딸이라고 해서 아무런 조건과 검증없이 기업경영에 참여한다면 누가 그 사람들을 그룹의 관리자라고 인정할까.

중국 기업들은 이미
탈 세습경영 시작

탈세습경영 바람은 중국에서 불고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자녀들을 속속 기업의 중요자리에 배치시키며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는 동안 중국에서는 대기업 오너들이 ‘세습경영 절대 불가’를 선언하고 있다.

대표적인 오너들은 대만 훙하이 그룹의 궈타이밍 회장, 화웨이의 런정페이 총재 등이다.

훙하이 그룹은 애플 제품 생산으로 유명한 폭스콘의 모기업이다.

대만 재계에서는 궈 회장 아들인 궈서우정 산창디지털 이사장이 폭스콘 경영권 계승자로 적임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궈 회장은 지난 여름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궈서우정은 물론 조카 등 가족에게 절대 경영권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대내외에 선포했다. 가족을 경영 일선에서 제외한 후 그룹 내의 유능한 젊은이를 대상으로 검증을 거쳐 후계자를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궈 회장은 “(아들과 조카 등) 이들 젊은이에게는 비슷한 문제점이 있다”는 말을 통해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친족의 기업 계승이 회사의 장기적 발전에 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를 간접적으로 피력했다.
중국의 이동통신 장비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 총재도 그간 여러 차례 경영권 가족 계승 반대를 외쳐왔다. 올해로 71세를 맞은 런 총재는 지난 6월 중국 언론과 처음으로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화웨이를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런 총재의 기업 경영관은 그룹 내 최고경영자 순환 보직 제도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화웨이는 의사결정권이 있는 임원이 일정기간마다 돌아가며 CEO를 맡고 있다.

런 총재는 “(가족을 후계자에서 배제하는 것은) 회사 안팎의 불필요한 추측과 이로 인한 회사 내부의 혼란을 막기 위함이고, 이러한 원칙은 이미 공식 문서로 밝혔다”고 강조했다.

재계만큼이나 세습이 만연한 곳이 정계다. 정계에서 세습은 오히려 큰 장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시작한 정치가는 경쟁자들에 비해 지지도가 높고 활동 반경도 크다.

2세·3세 정치인
모두 다 잘하지는 않아

‘세습 정치인’이라는 딱지로부터 박근혜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은 정치인 2세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대통령이 된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후광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다른 2세 정치인으로 새누리당의 김무성 당대표, 유승민 의원, 김세연 의원 등도 있다. 김무성 당대표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지냈다. 야당의 정호준 의원은 3세 정치인이다. 정 의원의 아버지는 정대철 전 의원, 할아버지는 정일형 전 의원이다. 정일형 전 의원은 과거 장면 내각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서울 중구를 중심으로 한 선거구에서 2대부터 9대까지 무려 8선을 기록했다. 그의 아들인 정대철 전 의원은 아버지가 ‘3.1 명동사건’에 연루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자, 1977년 종로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된 이래 5선을 지냈다.

정대철 전 의원과 마찬가지로 앞선 의원들은 유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의 선거구까지 물려받았다. 단순히 아버지의 브랜드만 등에 업은 것이 아니라 지역구까지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들이 아버지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점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국정활동을 하고 있는지는 짚어봐야 할 문제다.

사실 정치권력의 세습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여름 장관직을 사직한 오부치유코 전 일본 경제산업상은 2000년 5월 갑작스럽게 뇌경색으로 사망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둘째 딸이다.

그는 아버지 사망 직후 TBS 방송국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내리 5선을 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오부치 고헤이도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기 때문에 오부치 가문의 의원직 세습은 3대째에 이른다. 하지만 오부치 의원은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으로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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