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매장 3년 만에 돌아온 아들, 아버지는 이미 하늘에…

▲ <뉴시스>
한국·필리핀 경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총동원해 발굴
필리핀 경찰청 내 설치된 코리안 데스크가 큰 역할

[일요서울|오두환 기자] 필리핀이 한국인 해외 범죄 최다국으로 떠올랐다. 신학용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 9월 11일 외교부로부터 제출 받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외국에서 범죄 피해를 당한 재외국민 피해자 수가 지난해 4967명으로 나타났다. 이중 국가별 피해 건수를 살펴보면 지난해 기준 필리핀이 780건으로 가장 많아 598건의 범죄 피해가 발생한 중국을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 필리핀에서 발생한 범죄 피해는 살인 13건, 강도 12건, 절도 678건, 납치 9건, 폭행·상해 12건 등이었다. 올해 상반기 기준 필리핀에서 발생한 범죄 피해는 495건으로 지난해 총 범죄 피해의 절반을 넘어선 상태다. 필리핀은 국내 여행객들에게 관광지로도 유명한 만큼 정부의 자국민 보호 프로그램이 절실한 상황이다.

필리핀이 범죄천국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최근 필리핀을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납치·강도행각을 벌여온 최세용(48)씨의 현지 은신처에서 실종자 2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부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달 필리핀 경찰청 납치사건전담반과 함께 마닐라 외곽의 한 주택에서 김모(실종 당시 50세)씨와 홍모(29)씨의 시신을 발굴했다고 17일 밝혔다. 

관광객 손에는 수갑
발에는 쇠사슬 채워

최는 2007년 7월 9일 경기도 안양의 한 환전소에서 여직원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1억8천500만원을 빼앗아 필리핀으로 달아났다. 이후 최씨는 2년 전 송환돼 복역 중인 한모(41·여)씨와 김모(20)씨 등 공범과 함께 필리핀을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납치강도 행각을 벌였다.

이들은 필리핀에서 여행을 하고 있는 관광객들이 인터넷 카페 등에 “동행을 구합니다”라는 글을 올리면 그 글을 보고 연락을 해 관광객들을 만났다. 이후 자신이 알고 지내는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술집에 가자고 한 뒤, 차를 타고 옮기는 과정에서 다른 일당들이 합류해 관광객들을 납치했다.

일당은 관광객들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가서 손에 수갑을 발에는 쇠사슬을 채운 뒤에 폭행을 가했다. 그리고 나서 관광객들에게 한국으로 전화해 돈을 송금 받으라고 시켰다. 피해자들은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천만 원 안팎의 돈을 받아 일당들에게 건네줬고, 돈을 챙긴 일당은 피해자를 공항으로 데려가 한국으로 강제 출국 시켰다.

일당이 2008년 1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저지른 범행은 11건이었는데 최근 수사에서 8건이 추가로 드러난 것이다. 전체 피해 금액만 5억2천만 원에 달한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범행 총 19건
범인은 모두 잡혀

여행객 납치사건에 연루된 범인 8명 가운데 4명은 국내로 송환돼 수감 중에 있으며, 1명은 필리핀에서 자살했다. 또 다른 공범 1명은 필리핀 현지에서 복역 중이며, 필리핀인 공범 2명은 현지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 
최는 2012년 11월 수사망이 조여오자 필리핀에서 태국으로 달아나려다 여권법 위반으로 붙잡혀 지난해 2월 태국 법원에서 징역 9년 10월을 선고 받았다. 태국에서 징역을 살던 최는 한국·태국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지난해 10월 국내로 송환됐는데 입국장에서 취재진을 향해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여 온 국민이 경악했다.

비파괴탐측장비 동원
한국인 시신 2구 발견

이번에 발견된 시신들은 각각 2010년 12월과 2011년 9월 필리핀 여행 중에 실종된 희생자로 보고 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최씨가 범행 당시 일부 공범과 함께 머무르던 곳으로 마당이 있던 곳에 시신을 묻고 그 위에 새로 집을 지어 범행을 은폐해 왔다.

경찰은 지난달 25일 필리핀 경찰과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비파괴탐측장비를 동원해 정확한 시신 암매장 장소를 찾아냈다. 지난해 10월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살해 암매장했다는 최씨의 범행을 자백받은 지 약 1년이 지난 뒤였다.

사건 당시 암매장 장소는 주택 뒷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집주인이 그 위에 별채를 지어 놓았다. 시신 발굴 조건은 까다로웠다. 집주인을 설득해 받아낸 조건은 ‘방바닥 1.5×1.5m크기를 한 번만 파라’였다.
부산경찰청 조중혁 국제범죄수사대장을 발굴 조사팀장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박사, 법인류학 교수 등 총 7명으로 발굴 조사팀이 꾸려졌다. 발굴팀은 지난달 23~28일까지 현지로 떠났다. 문제는 1.5×1.5m크기를 정하는 것이었다.

공범들의 진술을 더 분석하고 국과수가 비파괴탐측장비를 이용해 땅 속 흙 성분을 분석했다. 지하 3m까지 흙의 경도 등을 분석해 흙이 아닌 다른 성분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정했다. 시신발굴에 대비해 휴대용 치과X선 촬영기도 준비했다. 인부들이 타일바닥을 깨고 흙을 파내기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백골상태의 한국인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발굴은 필리핀 경찰청 납치사건전담반 내 설치된 코리안 데스크가 큰 역할을 했다. 코리안 데스크는 한국경찰 1명과 필리핀 경찰 6명으로 이뤄졌다. 한국경찰이 주도하면서 필리핀 경찰의 협조를 받는 형태여서 수사가 빨리 진행됐다.
백골 상태의 시신을 치아 자료와 확보해 대조한 결과 실종자의 것과 일치했다. 현재 유골은 유족들에게 인계된 상태다.

피해자 아버지 납치 확신
지난해 목숨 끊어

발견된 시신 중 1구는 청주에 살았던 홍씨로 밝혀졌다. 홍씨는 지난 2011년 9월 19일 5박 6일의 일정으로 필리핀 여행을 떠났다. 이날 오후 홍씨는 아버지에게 ‘필리핀 미성년자와의 동침으로 문제가 생겨 합의해야 한다’며 돈 1천만 원을 송금해 달라고 부탁하고 연락이 끊겼다.

홍씨의 아버지는 3일 뒤인 22일 새벽 한국에 도착한 필리핀 발 비행기에서 홍씨를 찾을 수 없자 납치임을 확신했지만 경찰과 외교통상부는 도박 또는 여자 문제로 인한 단순 가출 의견만을 내놓았다.
홍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발로 뛰었고, 아들이 필리핀 내 한국인 관광객 납치단과 연루돼 있음을 알았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지난 2007년 안양 환전소 강도 살인범으로 필리핀에 도주한 최세용이 포함돼 있었다.

최세용 일당은 2012년 태국에서 체포됐고, 경찰은 태국으로부터 이들을 인도받아 수사를 벌인 끝에 지난해 10월 홍석동 씨 등을 상해 암매장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하지만 홍 씨 아버지는 지난해 1월 1일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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