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도 혹한 ‘파란 배춧잎’의 정체를 말한다

납치 용의자 정승희씨의 공개수배 전단.(좌) · 모조지폐

경찰이 납치범을 따돌리기 위해 사용한 ‘모조지폐’가 일반인에게까지 흘러들어가 수사당국과 한국은행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달 서울 제과점 여사장 납치 사건에서 범인들이 몸값조로 챙겨 달아난 현찰 7000만원은 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였다. 그런데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납치 용의자 정승희(32)씨가 이 중 700만원으로 중고 오토바이를 직거래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당초 “수사용 모조지폐는 생김새가 조악해 한눈에 티가 난다”며 호언장담했던 경찰은 순식간에 거짓말쟁이가 됐고 정씨에게 오토바이를 넘긴 시민은 ‘700만원처럼 생긴’ 종이조각만 손에 쥘 판이다. 최근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파란 배춧잎’의 유혹이 당신을 노리고 있다. ‘한국판 슈퍼노트(위조 달러 화폐)’로 불리는 수사용 모조지폐의 제작과정과 함정을 피하는 방법을 집중 해부했다.


우리나라선 2005년 수사용으로 등장

영화 ‘타짜’에서 주인공 고니(조승우 분)가 열차에서 조직폭력배와 싸우다 가방이 열리면서 공중에 날린 수십억원의 돈다발은 모두 가짜였다. 제작팀이 무려 1000만원을 들여 컬러복사기로 1만원권 80억원어치를 복사해 쓴 것이다.

이처럼 범죄조직이 만드는 위조지폐와 달리 영화촬영이나 경찰 수사 등 특별한 목적으로 제작되는 가짜 돈을 ‘모조지폐’라 한다. 위조지폐와 다른 점은 무게나 크기가 진짜와 똑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뿐. 만약 이를 어기면 형법상 위조지폐와 같은 수위의 처벌을 받게 된다.

경찰이 범인을 유인하는 수단으로 모조지폐를 사용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05년경부터다. 대전에서 59세 주부가 납치됐고 범인들은 피해자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했다. 가족이 온갖 예금을 탈탈 털어 마련한 현금은 총 1억9600만원.

그런데 범인들은 피해자 가족의 ‘피 같은 돈’이 든 가방을 챙긴 뒤 80여명의 경찰 병력을 따돌리는 기록적인 탈주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피해자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 왔지만 2억원에 달하는 거금은 범인들과 함께 공중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지 석 달 뒤 경찰은 1만원짜리 모조지폐 12억원어치를 만들어 각 지방경찰청에 분배했다. 이들 ‘경찰 소속’ 구권 모조지폐들은 지난 2007년 8월 288만원의 추가예산을 들여 모두 신권으로 교체됐다.

경기지방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모조지폐는 한 눈에 보기에도 진짜 돈과 구분이 쉽지 않다. 이 관계자는 “1만원권 모조지폐의 경우 색깔이나 모양이 진짜 현찰과 똑같다. 돈의 까끌까끌한 질감을 살리기 위해 특수 용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눈을 감고 만져 봐도 진짜 돈과 차이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일반인이 봤을 때 가장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크기다. 경찰에 따르면 모조지폐는 양쪽 가로 길이가 진짜 돈보다 1mm정도 더 길다. 또 위조방지 프로그램인 뒷면의 홀로그램이 밝은 은색이 아닌 회색이다.


진짜 같은 가짜, 구별법은?

최근 사건만 놓고 본다면 당분간 지갑 속 1만원권의 일련번호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경찰이 제과점 여사장 납치사건 용의자들에게 건넨 지폐는 모두 ‘EC1195348A’라는 일련번호가 적혀있다.

혹시라도 문제의 모조품이 시장에 흘러들어갈 경우 수사당국이 이를 회수하기 쉽도록 일련번호를 통일해 준비한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 양천경찰서가 지난 18일 용의자 정씨에 대해 공개수배령을 내린 것도 시장에 풀리기 시작한 모조지폐를 조금이라도 빨리 거둬들이기 위해서다.

또 기본적인 위폐 구별법만 알고 있다면 모조지폐를 구분해 내는 것은 의외로 쉽다. 경찰 관계자는 “겉으로 보기엔 진짜 돈과 별 차이가 없지만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는 면으로 봤을 때 왼쪽 여백에 나타나는 ‘숨은 그림’이 없다”고 말했다.

또 오른쪽에 세로로 찍힌 점 3개 안에 드러나는 오톨도톨한 점자 표식도 없다. 결국 위조지폐 구별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가짜 배춧잎’을 솎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납치범들도 속아 넘어간 ‘한국판 슈퍼노트’의 제작과정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당초 경찰은 “2005년 모조지폐 12억원을 처음 제작했을 때 한국은행(한은)에 공문을 보내 자문을 얻었고 ‘시장에 유통시킬 목적이 아니라면 사용해도 좋다’는 답신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해왔다.


제작과정은 미스터리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한은이 “경찰로부터 (모조지폐 제작과 관련해)어떤 협조 공문도 받은 적이 없다”고 선을 그어 경찰의 입장이 머쓱해졌다. 한은의 주장대로라면 경찰이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은 채 위조지폐를 만들어 퍼트린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한편 이미 700만원의 손해를 본 오토바이 판매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해서도 경찰과 한은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관련 규정이 없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은 발권국 발권정책팀 김성용 과장도 “피해 금액을 1:1로 보상할 계획은 현재까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김 과장은 “한은에선 위조지폐를 신고하면 액수에 상관없이 6800원 상당의 현용주화세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보상금이나 위로금 차원이 아닌 홍보 차원의 선물이다”고 말했다.

한편 모조지폐 사건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국내 수사국과는 달리 미국은 체계적인 모조지폐 제작, 운용 매뉴얼을 마련해 놓고 있다. 미국은 연방준비은행(FRB)과 조폐 당국이 경찰과 협조해 모조지폐를 만든다. 지난 2007년 마약자금을 추적하기 위해 800만달러(약 118억원)를 만들어 수사팀에 제공하기도 했다.

즉 공익을 위한 모조지폐 활용이 일반적이며 만약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면 무조건 액면가 1:1 보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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