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PD가 엔초 페라리타고 시속 355㎞ 드래그 레이스


시내 도로를 다니다보면 수억 원대에 이르는 최고급 스포츠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스포츠카들 중 일부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낮에는 교통체증에 막혀 순한 말처럼 얌전하지만 밤에는 폭주기계로 돌변한다. 이번에 경찰에 적발된 수백 대의 스포츠카들이 대부분 이런 두 얼굴의 차들이다. 서울경찰청 교통안전과는 주말 심야시간대 도심 외곽 도로에서 일명 '드래그 레이스(Drag Race)'라 불리는 고속 질주 경기를 한 혐의(도로교통법 위반 등)로 301명을 적발했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놀랍게도 이들은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사선을 넘나드는 레이스를 펼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대체 어떤 이들이기에 10억 원이 넘는 스포츠카를 타고 드래그 레이스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일까.

영종도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 진입로 초입. 톨게이트를 지나 얼마 멀지 않은 곳에 10여대의 스포츠카들이 길 한편에 줄지어 서 있다. 운전자들은 차 밖으로 나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길을 지나는 차량들은 최고급 스포츠카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을 신기한 듯 구경한다. 스포츠카의 오너들은 이런 시선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잠시 후 검정색 스포츠카 한 대가 미끄러지듯 무리들 틈으로 다가가 다른 스포츠카 오너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야기가 끝나자 오너들은 일제히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건다. 검정색 스포츠카가 앞장서고 다른 스포츠카들이 그 뒤를 쫓는다.

그렇게 수 백 미터를 규정 속도로 주행하던 스포츠카들은 어느 순간 굉음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속도를 올려대기 시작했다. 10여대의 스포츠카들은 아슬아슬하게 다른 차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빛의 속도로 내달렸다. 어떤 스포츠카는 엔진을 개조한 탓인지 배기관에서 푸르스름한 불꽃을 내뿜었다.

경찰측정결과 이들이 내달린 속도는 최고 시속 300Km에 이른다. 운전자들은 이렇게 달리다 일정 구간에 모여 드래그 레이스를 시작한다. 드래그 레이스란 2대 차량이 400m 직선 도로를 고속질주, 승자를 가리는 자동차 경주의 일종이다.


쭉 뻗은 도로가 레이스 장소

경찰에 따르면 스포츠카들은 인천 영종도와 경기 분당, 임진각 자유로, 서해대교 부근 도로에서 주로 레이스를 벌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단속된 이들이 지난해 3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주말 밤마다 도로 통행을 강제로 막고 722차례에 걸쳐 '드래그 레이스'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드래그 레이스는 온라인 카페 등에서 활동하는 회원들끼리 만나 벌이는 경우도 있고 모임 멤버들이 도로에서 따로 만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이번에 구속영장을 신청한 이들 중엔 폭주 사이트와 카페 운영자 3명이 포함돼 있다.

경찰은 “카페운영자 황모(30)씨 등은 인터넷을 통해 폭주 모임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며 “현재 추가 조사를 계속 벌이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 뿐 아니라 조직적인 모임을 따로 결성해 수시로 레이스를 벌였다”고 말했다. 아울러 경찰은 사이트 게시판 내에서 빈번히 이뤄지는 폭주 모임을 방치한 혐의로 국내 최대 중고차 사이트 운영자 2명도 형사입건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경찰조사결과 이들은 폭주 경기에 필요한 400m직선도로를 확보키 위해 차량 통행을 강제로 막거나 폭주 투어에 참여한 차량의 통행을 위해 경찰 신호제어기를 임의대로 조작하는 대담성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더 놀라운 것은 이 혈기왕성한 레이서들이 20대~30대 젊은이가 아니라 40대 중년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적발된 이들 가운데는 의사나 약사, 프로골퍼, 방송사PD, 연예기획사 대표 등 전문직을 비롯해 대기업 임원 자제나 고소득 자영업자가 다수 포함돼 있다고 경찰은 밝혔다.


부유층 차고 안 희귀명차 즐비

단속된 이들은 17억원을 호가하는 페라리 엔초와 10억원대 코닉세흐 등 고급 외제 스포츠카 등을 이용해 광란의 레이스를 즐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 상당수가 두 대 이상의 고급 외제차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수억 원대의 고급 외제차를 소유한 이들은 대부분 여러 대의 최고급 외제차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외제차를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소량 생산된 희귀차량이나 생산 중단된 지 오래인 이른바 ‘올드카’를 갖고 있다. 이런 차들은 그 가격이 10억 원을 쉽게 넘긴다.

포털 사이트 카페엔 극소수의 멤버들로만 운영되는 자동차·모터사이클 관련 카페가 있다. 예컨대 ‘○○클럽’이라는 카페는 회원수가 10여명에 불과하다. 이 카페는 비회원이 아예 들여다 볼 수조차 없게 철저히 비공개로 운영되고 있다. 이 카페 회원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로열패밀리다. 굴지 대기업 총수 가족, 모 건설회사 사장, 유명 식품업체 부회장 등이 이 카페의 회원이다. 서로의 호칭은 형 동생으로 통한다. 그만큼 회원들끼리 가깝다는 이야기다. ○○클럽을 들여다보면 회원들은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을 서로 자랑하듯 게시해 놓고 있었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이 회원들의 차고를 찍은 사진이다. 한 회원의 차고엔 모두 6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 차량을 모두 합한 가격은 8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또 다른 회원은 10억 원이 넘는 최고급 외제차를 모 인사로부터 구입했다며 사진을 올려놨다. 세계적으로 50여대에 불과하다는 포르쉐 스포츠카였다. 이들의 차고는 공통점이 있다. 최고급세단, 최고급 스포츠카, 희귀 올드카,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등을 거의 필수 요건처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카페의 회원인 한 인사는 이번 경찰 단속에 대해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것은 백번 잘한 일이지만 한꺼번에 수백 명씩 처벌하기보다 꾸준한 단속을 펴는 게 더 단속에 효과적일 것 같다”며 “그리고 이번에 영종도 공항 도로에서 시속 355Km로 달렸다는 건 좀 과장된 것 같다. 자동차의 최고시속이 그렇다는 것일 뿐 그쪽은 바람이 심해 280~290Km이상의 속력을 내긴 힘들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의 이번 단속에 대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은 적게는 수십 번에서 많게는 수백 번에 이르도록 드래그 레이스를 즐겼는데도 경찰은 제대로 단속을 하지 않다가 이번에 비로소 일제단속을 벌였다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이번에 단속을 했다고 해도 레이스를 한 이들은 과속범칙금 정도만 물고 끝날 것”이라며 “10억 원대의 스포츠카를 소유한 이들은 범칙금을 100번 물어도 레이스를 계속 한다.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폭주 근절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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