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꿈꾸는 현대판 빠삐용된 '청지기'

[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청와대가 비선 실세 문건 파문 후유증으로 새해 벽두부터 뒤숭숭하다. 문건 유출 파문으로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정윤회와 박지만’, ‘문고리 3인방’, ‘십상시’, ‘7인회’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게 됐다. 검찰에서 ‘실체가 없다’며 면죄부를 줬지만 청와대가 한줌의 측근들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처럼 비춰진 이번 파문으로 청와대 내 다수의 근무자들을 맥빠지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면보고가 꼭 필요하느냐’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청와대 직원들의 힘을 빼는 결정타가 됐다.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는 지지율로 이어져 취임후 최저치를 기록하게 만들었다. 여권에서조차 ‘임기말 권력 누수현상이 시작됐다’고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임기말에나 나타나는 청와대 수석뿐만 아니라 비서관, 선임행정관 등의  탈출 러쉬가 이어졌고 탈출을 꿈꾸는 인사들이 늘어나면서 국정 난맥상은 고스란히 국민들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 민정수석 항명사태…본질은 청와대 ‘발빼기’
- 비서관 줄사퇴, “권한은 없고 책임만…미련 없어”


“감옥인 듯 감옥 아닌 감옥같은 청와대~”

최근 청와대내 에서 유행하는 것으로 유명 가수의 노래를 개사해 자신들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비유한 노랫말이다. 청와대가 탈출을 꿈꾸는 현대판 빠삐용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역대 정권을 보면 임기 말에 나타나는 것으로 권력 누수 현상의 일종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집권 3년차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는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수석·비서관·행정관·기능직이 있다. 실장은 장관급이고 수석은 차관급, 비서관은 1급, 행정관은 선임이냐 아니냐에 따라 2급부터 5급까지 존재한다. 기능직은 6급 주무관 이하가 많다. 통상 청와대 근무는 파견 공무원과 정치권 출신으로 대선 공신들로 이뤄진 별정직 공무원으로 나뉘어진다. 파견 공무원이든 별정직 공무원이든 1~2년 고생하면 영전하든지 좋은 자리로 옮길 수 있어 청와대 근무를 마다할 인사가 없다. 그래서 서로 줄을 대어 들어가려고 안달이다.

지난 2년간 청와대 인사는 이런 맥락 속에서 이뤄졌다. 공직자로서 스스로 처신을 못해서 날아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권력 암투’의 결과나 ‘누가 수석으로 오느냐’에 따라 청와대 비서관·행정관 인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 청와대 인사 발생은 성격이 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서로 청와대를 나가고 싶어 안달을 하고 밖에서는 안 들어가려는 ‘청와대 기피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비선 실세 문건 유출…‘무기력증’ 걸린 청와대

특히 이런 현상은 지난 연말에 터진 ‘비선 실세 문건 유출파문’이후 분위기가 변했다는 게 내부에 정통한 인사들의 전언이다. 청와대나 검찰에서는 ‘찌라시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냈지만 권력의 속살이 노출돼 다수의 청와대 근무자들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문건에는 청와대 비서실의 수장인 김기춘 비서실장을 필두로 대통령의 친동생 박지만, 최태민 전 목사 사위 정윤회, 문고리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과 십상시에 ‘7인회’, ‘신7인회’까지 권력 핵심 실세들이 등장해 서로 인사와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으로 묘사된 문건은 권력 이너서클에서 배제된 다른 직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런 무기력증은 대통령 신년사에서 ‘대면보고가 꼭 필요하느냐’는 대통령의 ‘여왕적 인식’이 드러나면서 더욱 심화됐다. 평소 대면 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소수의 측근들로부터 선별적 보고만 받을 수밖에 없고 권력 집중 현상이 심화될 공산이 높다. 실제로 홍경식 전 민정수석과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청와대 근무하면서 ‘대통령 대면보고’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민정수석이 고위직 인사 검증과 친인척 관리 등 정보를 다루는 핵심 부서이자 충성도가 남다른 부서임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 관계자 역시 “이병기 국정원장도 임명된 후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한번도 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할 정도다. 청와대 민정 수석이나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지 않았다면 여타 수석의 경우 어떠할지 명약관화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청와대에서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항명파문이다. 김 전 수석은 지난 1월 9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할 예정이었으나 ‘출석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명분은 ‘민정수석의 국회 출석 전례를 막기 위한 차원이다’라고 내세웠지만 여야가 합의하고 상사인 김기춘 비서실장이 지시한 상황에서 이를 거부한 것은 ‘항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김영한 항명 파문 “청 나가기 위한 초강수”

이에 왜 김 전 수석이 항명으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하면서 불출석한 것에 대해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한 한 야권 인사는 “오죽하면 그랬을지 생각해야 한다”면서 “민정 수석이라는 자리가 막중한 자리인데 대통령 얼굴 보기도 힘들고 보고해도 감감무소식이고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우고 ‘윗선 오더’만 수행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에 대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이 인사는 “게다가 청와대 근무하는 게 오히려 훈장이 아닌 오점으로 남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면서 “탈출 명분만 있으면 뛰쳐나오고 싶은데 마침 김 전 수석은 운영위 참석 결정을 청와대를 나갈 빌미로 삼았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인사는 “노무현 임기 말 청와대를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은 많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어 인재 품귀 현상이 나타났는데 박 정권은 집권 3년차에 벌써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권의 한 인사 역시 이와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새해 들어 청와대 선임 행정관들을 만나보면 ‘청와대를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면서 “그럴 때마다 ‘들어갈 때는 언제고 지지율 떨어진다고 나오면 되느냐’고 만류를 한다”고 최근 청와대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우병우 민정 비서관이 민정수석이 되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민정수석실 산하 비서관 4명이 모두 사의를 표명했거나 할 예정이다. 우 전 비서관이 수석으로 되면서 민정비서관이 공석이고 김종필 법무비서관과 김학준 민원비서관은 사의를 표명했다. 권오창 공직기강비서관의 경우 개각으로 인한 후보자 인사검증 작업을 마친 뒤 사표를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직원들의 ‘탈출 러쉬현상’은 곧 국정운영의 난맥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가적 손실일 수밖에 없다. 당장 공직기강 해이현상은 몇 몇 장관들의  ‘오락가락’ 정책으로 나타났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1월28일 “금년 중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안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며 건보료 개편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최근 담뱃값 인상으로 서민들의 조세저항 움직임이 강한 데다 연말정산 대란이 터진 가운데 고소득 직장인과 피부양자에게 보험료를 추가로 부과하는 내용의 개편안이 나올 경우 반발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감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다.

하지만 정부가 3년간 공들여온 건강보험료 부과 방식 개편을 발표 예정일 하루 전에 사실상 백지화한 것에 대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특히 ‘송파구 세 모녀’처럼 소득이 적은 지역가입자 600만 가구에 보험료 부담 완화를 포기하고 고소득 직장인 45만명의 반발을 우려해 백지화시켰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 청와대에서는 “건보료 백지화는 사실무근이고 전적으로 장관 판단”이라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청와대와 정부의 ‘불통’은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1월25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냈다”면서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을 추진하겠다”는 돌출 발언으로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장관이 정책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의 결심을 운운’하는 것에 청와대는 화들짝 놀랐고 질타가 이어지자 행안부는 당일 밤 보도 자료를 부랴부랴 내고 “지방세법 개정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정 장관의 발언을 백지화했다.

靑 ‘산으로…’장관은 ‘바다로…’

정 장관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밝힌 사안인데 행정자치부에서 백지화한 것이라면 항명인 셈이고 정 장관이 대통령이 아닌 청와대 다른 누군가로부터 대신 ‘결심’을 받은 것이라면 재차 ‘보이지 않는 측근에 의해 국정 농단’이 일어난 셈이 된다. 어떤 경우든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장관은 장관대로 기강 해이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일어난 셈이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이 김기춘 실장이 사임 의사를 밝혔음에도 왜 유임시킬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며 “김 실장이 그나마 있어 이 정도지 없다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청와대 비서진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사고가 터질 것”이라고 연임 사유를 해석했다.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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