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잡기 전에 형님 먼저 갑니다’ 조폭 협박에 전쟁선포”

'가정파괴범' 황인규 일당의 사건을 보도한 당시 일간지.

강력 사건과 관련된 보도에서 ‘가정파괴범’이란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추악한 범죄로 선량한 가족을 짓밟은 파렴치한에게 붙이는 수식어가 처음 신문지상에 등장한 건 지난 1982년. 서울 일대 가정집을 돌며 30여명의 부녀자를 집단 성폭행하고 강도행각을 일삼은 ‘황인규 사건’의 일당들이 검거된 직후다. ‘순수하게 지켜져야 할 가정을 파괴한 정신적 살인마를 검거했다’는 송수영(72) 당시 성동경찰서 강력반장의 표현을 따서 기자들이 검거된 황인규에게 ‘가정파괴범’이란 수식을 붙였다. 전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가정파괴범’ 황인규는 사건 발생 3년여 만인 1985년 11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범죄자에 대해 국내 최초로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악의 ‘가정파괴범’을 잡아들인 장본인이자 33년 간 ‘강력계 대부’로 자리매김한 송수영 전 경감. 그가 바로 <일요서울>이 만난 ‘대한민국 수사반장’ 두 번째 주인공이다.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만난 송 전 경감의 첫인상은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눈빛’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일흔을 넘겼음에도 그는 검도, 유도 등 격투기 도합 10단이라는 프로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당당한 풍채를 자랑했다. 11년 전 서울지방경찰청 근무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한 송 전 경감은 전국을 통틀어 몇 안 되는 ‘강력계 대부’로 통한다.


서른 살 늦깎이 신참 형사

경찰전문학교 56기 출신인 송 전 경감은 1966년 서울 성동경찰서 강력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이후 굵직굵직한 사건을 도맡으며 특진을 거듭했다. 서울시 경찰국 ‘330 수사대’ 형사를 거쳐 강남경찰서 강력반장, 서울지방경찰청 폭력계장을 지냈다.

70~80년대 수도권 일대 강력 사건을 일선에서 지휘한 손 전 경감은 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수사연구관 신분이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 자문위원과 황해도 신계군 명예군수로 활동하고 있다.

33년 동안 ‘강도 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송 전 경감이지만 처음부터 경찰에 투신할 생각은 없었다. 집안사정으로 27살에야 군에 입대한 그에게 ‘경찰’은 먹고 살기 위한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죽마고우가 당시 용산경찰서에 근무했는데 ‘수영이 너 격투기도 잘하고 의협심도 있으니 형사가 돼보는 게 어떻겠냐’ 하더군요. 처음엔 장난삼아 하는 말이려니 했는데 제대하고 바로 이튿날인가 그 친구가 경찰학교 입학원서를 내미는 거야. 운명이었는지 단번에 시험에 합격해 성동경찰서 강력계 순경으로 근무하게 됐지요.”

처음엔 ‘3~4년 하다 때려치워야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른 살 늦깎이 신참 형사의 하루는 야근과 잠복, 밤샘의 연속이었던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순경 송수영’은 형사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송 전 경감은 경찰 입문 4년 만인 1970년 전국을 통틀어 가장 많은 강력사범을 검거해 경장으로 특진, 일선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8일 만에 덜미 잡힌 ‘가정파괴범’

“10여 년 전 나한테 경찰직을 권했던 친구가 정년을 4개월 앞두고 조폭에게 살해됐습니다. 그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죠. 그래도 경찰이 천직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더군요. 방심하는 순간 위험이 닥치는 게 바로 형사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강력반장 송수영’을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띄운 것은 1983년 벌어진 ‘황인규 떼강도 사건’이다. 주범 황인규를 비롯한 일당 7명은 서울 일대 가정집에 침입해 30여명의 부녀자를 집단강간하고 금품을 빼앗았다. 특히 황은 피해자의 부모가 보는 앞에서 10대 소녀를 겁탈하는가 하면 모 신문사 기자의 아내를 가족들 앞에서 윤간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더구나 피해 주부는 임신 5개월의 예비엄마였다.

전국이 떼강도 공포에 몸살을 앓고 있을 무렵 송 전 경감의 관할지역인 서울 약수동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직감적으로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송 전 경감은 현장에 출동해 목격자들을 상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마침 범행을 끝내고 도주하는 범인들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목격자 말이 용의자들 모두 얼굴을 가리거나 서두르는 기색 없이 유유히 빠져나가더라는 겁니다. 범행 지역에 연고가 없는 뜨내기 짓이라는 감이 오더군요.”

곧장 서울시경으로 달려간 송 전 경감은 전국에서 벌어진 유사사건 목록과 동일전과자 리스트를 뽑았다. 동시에 피해자들이 빼앗긴 패물과 수표 등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다. 서울 마포의 한 호텔에서 도난수표가 사용된 것.

하지만 범인은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수표 뒷면에 이서를 한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범인이 진짜 주소와 전화번호를 썼을 리 만무했던 것. 송 전 경감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리 확보한 방대한 용의자 리스트 가운데 수표에 남아있는 전화번호, 주소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마침내 송 전 경감은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용의자를 압축할 수 있었다. 곧바로 탐문수사를 시작하자 주범 황인규와 더불어 가까운 동창과 지인 등 5명이 동시에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버린 일당을 잡기 위해 송 전 경감은 머리를 써야했다.

“당시 황인규에게 죽고 못 사는 애인이 있었어요. 그 아가씨를 찾아가 검거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꼬박 사흘 밤을 그 집 앞에서 세웠습니다. 결국 아가씨 부모님이 나서 수사 협조 약속을 받아냈죠.”

결국 대전역 광장에 애인을 만나러 왔던 황인규는 미리 잠복하고 있던 송 전 경감에게 붙잡혔고 나머지 일당들도 모두 소탕됐다. 신고 접수 8일 만이었다.


미국 의회마저 술렁인 ‘미국인 여강사 피살사건’

서울올림픽 직후 벌어진 서울 잠실동 ‘미국인 여강사 피살사건’ 역시 송 전 경감이 꼽는 희대의 강력사건이다. 1988년 당시 S영어학원 원어민 강사였던 A씨(여·미국)가 자택에서 잔혹하게 피살된 채 발견됐다.

“강남서 강력반장 때였는데 현장에 가보니 온통 피바다더군요. 피해자가 무려 124군데를 찔렸는데 목은 아예 잘려나가다시피 할 정도로 난자당한 상태였습니다.”

자국민이 한국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자 미국 정부와 현지 언론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극동사령부 수사관이 파견돼 피해자 감식을 담당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서울올림픽 직후 반미시위가 격화된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인지라 수사팀 내부에서는 ‘반미성향을 가진 과격단체의 소행’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만약 사실이라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컸다.

“까다로운 사건이었죠. 그런데 현장에서 최초 신고자를 만나자마자 범인이 누구인지 감이 잡히더군요. 피해자의 직장동료 두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6개월 동안 정신없이 증거를 찾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송 전 경감에 따르면 사건을 처음 신고한 것은 피해자의 동료였던 미국인 강사 B씨(여)와 C씨(여), 그리고 한국인 수강생 D군 등 3명이었다. 송 전 경감은 B씨와 C씨가 피해자 집에서 없어진 물건의 목록과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

송 전 경감은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B씨가 홍콩으로 출국했다 이틀 만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의 행적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B씨가 범행과 관련된 물증을 홍콩 현지에 유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전문 통역관이 없는 상황에서 심문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물증은 나오지 않았다. 설상가상 유력한 용의자 B씨가 사건 발생 보름 만에 본국으로 유유히 도망치자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어 미군범죄수사대에 공조를 요청했죠.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한 끝에 결국 6개월 만에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C씨와 동성애 관계인 B씨가 자신들을 비난하는 피해자를 홧김에 살해한 거였죠.”

C씨는 살인방조 혐의로 한국에서 1년 7개월 형을 산 뒤 본국으로 추방됐다. 사건의 주범인 B씨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 못 잡으면 나 형사 그만둔다”

사회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송 전 경감. 그는 스스로를 ‘두려움이 없는 남자’라고 표현했다. 아직 장정 2~3명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는 송 전 경감은 1980년대 ‘범죄와의 전쟁’ 시절 일화를 꺼내놓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각 경찰서 강력계에 ‘요주의 인물’들이 배당됐죠. 대부분 조직폭력배 두목급이었는데 나는 수원파 두목 최OO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전국구 건달’로 유명한 최씨는 구달웅, 조일환 등과 함께 50년대를 주름잡은 거물이었다. 그를 잡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손떼라’는 직접적인 협박도 받았다.

“처음엔 최씨를 불러 경고를 했습니다. ‘눈에 띄지 말고 자중하라’고 말이죠. 그런데 얼마 뒤 일본 야쿠자 간부를 초청해 김포공항에서 ‘걸출한’ 환영식을 벌였더군요. 제 경고를 무시한 겁니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최씨가 저지른 범죄 사실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지라 작정하고 파고들었습니다.”

자신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사실을 안 최씨는 부하들을 이끌고 송 전 경감을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최씨는 “날 잡기 전에 형님이 먼저 가시는 수가 있다”며 그를 압박했다. 그러나 최씨의 협박은 오히려 자극제가 됐다. 송 전 경감은 그 자리에서 최씨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내가 너 못 잡으면 형사 그만둔다. 한번 붙어보자.”

송 전 경감은 수사착수 2개월 만에 최씨가 저지른 범죄혐의 12건을 확인해 그를 잡아들였다. 이 가운데 11개 혐의가 검찰에서 입증됐고 최씨는 죗값을 치러야 했다.


“無에서 侑찾는 게 형사”

인터뷰 내내 송 전 경감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언제 사건 호출이 들어올지 모르는 강력계 형사 시절의 습관이 여전히 몸에 밴 까닭이다. 그는 일종의 ‘직업병’이라며 웃었다.

“형사는 말이지 쉬는 날을 정해놓으면 안돼. 교대시간 됐다고 퇴근해버릇하면 수사의 맥이 끊어지거든. 어떤 사건이든 범인이 ‘큰 흔적’을 남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범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거든. 그 깨끗한 현장에서 실마리를 찾는 게 바로 형사입니다. 퇴근시간에 쫓겨 일하다보면 당연히 중요한 단서도 놓칠 수밖에 없죠.”

현역시절 송 전 경감은 한달이면 집에 있는 시간이 닷새도 채 되지 않았다. 아내는 평생 남편 걱정에 편히 잠을 못 이뤘다.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지 슬하의 두 아들은 ‘경찰이 돼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송 전 경감은 최근 젊은 형사들이 강력계를 기피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며 안타까워했다.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강력계 형사란 직업이 원래 힘들고 고된 직업이니까요. 열심히 뛰다보면 보람도 상당하죠. 다만 우리 후배들은 고생하는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았으면 한다는 겁니다.”

흔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고 했던가. 기약 없는 체력전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 ‘칠순의 청년’ 송수영이 깨달은 삶의 진리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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