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계 영웅’ 강찬기 전 경정 ‘최장수 형사’ 넘어 40년 8개월 전설이 되다

65년 광주 한국은행 갱사건 발생 당시의 신문보도 내용(좌) 86년 은퇴한 강 전 총경을 다룬 당시 언론 기획기사들.(우)

1979년 가을, 서울 연남동 한 단독주택 계단 밑을 파 내려가는 서울시경 강력반 소속 형사들의 삽질이 빨라지자 ‘강 반장’의 입은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결정적인 물증을 잡기까지 꼬박 100일이 걸렸다. 마침내 구덩이 속에서 김장비닐로 칭칭 동여맨 물체가 희끄무레한 속내를 드러냈다. “반장님, 나온 것 같습니다.” 후배 형사의 말에 강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석 달 열흘 간 강 반장이 미친 듯이 찾아 헤맸던 골동품상 부부와 그의 운전기사는 결국 여름 내 시커멓게 부패한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70년대 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금당 골동품상 살인사건’이 그의 손에서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2009년 여름, 30년 전 집념을 불태우던 ‘강 반장’은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됐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대한민국 경찰사(警察史)에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지난 86년 서울 용산 경찰서 수사과장을 끝으로 은퇴한 강찬기(84) 전 경정에겐 ‘대한민국 최장수 형사’ ‘강력수사계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국내 최고참 명수사관이 가슴으로 풀어놓은 희대의 사건들을 되짚어봤다.

기자를 반갑게 맞은 백발 노신사는 구구절절한 소개대신 두툼한 스크랩북 한권을 내밀었다. 꾹꾹 눌러쓴 글씨로 ‘지난 날’이라 이름붙인 스크랩북의 표지를 넘기자 오래된 흑백 증명사진이 눈에 띤다. 건장하게 벌어진 어깨와 또렷한 이목구비. 50~60년대 서울시경을 주름잡던 ‘강력계 강찬기 형사’의 전성기 시절이다.

“은퇴한지 20년이 넘어 인터뷰가 어색하다”며 말문을 연 강 전 경정.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의 경력을 아는 이들은 강 전 경정의 말이 지나친 겸손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 1945년 과도정부경찰관으로 수사계에 입문한 강찬기 전 경정은 1986년 6월 퇴직하기까지 2차례에 걸쳐 녹조근정훈장 등 대통령 훈장을 수여 받았다. 40년 8개월 간 경찰에 몸담으며 ‘국내 최장수 형사’ 기록을 세운 그는 총 80회가 넘는 크고 작은 수상경력을 쌓았다.

전문 강력계 수사관으로 이름을 날린 그가 해결한 굵직한 사건들은 열 손가락에 모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56년 프란체스카 여사 은식기 도난사건, 59년 마포 홍 장로 살인사건, 65년 광주 한국은행 갱사건과 79년 금당 살인사건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해결됐다. 또 84년 전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식품회사 독극물 협박 사건 해결 역시 그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다.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데 꼬박 100일이 걸렸지요. 자칫 영구미제가 될 뻔한 살인극의 전모를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부모가 살인마 손에 죽었다는 걸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소녀에게 알려야 했던 경험은 다시없을 비극이었지요.”


목격자 없애려 친동생 동원 연쇄살인

강 전 경정이 꼽은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당대 최악의 살인극으로 기록된 이른바 ‘금당사건’이다. 이는 전과자 박철웅(당시 32세)이 성공한 사업가 행세를 하며 서울 인사동의 부유한 골동품상과 그의 아내, 운전기사 등 3명을 유인해 몰살하고 수백만 원을 가로챈 사건이다. ‘금당’은 피살된 골동품상 정모(당시 39세)씨가 운영하던 골동품점 이름이었다.

“박철웅은 특별한 수입이 없었음에도 고급 외제품을 사제기하며 여인들의 환심을 사는 전형적인 카사노바였습니다. 동시에 냉혈 살인마였죠. 박은 목돈을 뜯어낸 뒤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 정 사장은 물론 그 부인과 운전기사까지 몰살했어요. 치밀히 계획된 범죄였습니다.”

피해자는 골동품 업계에서 상당한 알부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박은 거액의 현금을 가진 그를 표적으로 삼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탄탄한 체구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박은 성공한 청년 사업가 행세를 했습니다. 정 사장 가게에 찾아가 ‘가보로 내려오는 이조백자가 있는데 처분하고 싶다’는 식으로 말을 걸었죠. 박의 말쑥한 차림새에 피해자는 의심 없이 물건을 보여 달라며 따라 나섰는데 그게 정 사장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범행당일 서울 광화문 모 커피숍으로 정 사장을 불러낸 박은 ‘귀한 물건이라 가지고 나오지 못했으니 직접 우리 집에 가 백자를 확인하라’는 핑계를 대 그를 자택으로 유인했다. 연남동 단독주택으로 피해자를 데려온 박은 동거녀에게 차를 내오게 하는 등 손님 대접을 하는 척 했다. 그러나 동거녀가 자리를 비우자 박은 잔인한 본색을 드러냈다.

“피해자 손발을 철사 줄로 포박한 박은 집에 전화를 걸라고 시켜 몸값 1000만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정 사장 부인(당시 33세)이 구할 수 있는 돈은 500만원뿐이지요. 부인은 바리바리 돈을 싸들고 운전기사와 함께 남편이 감금된 연남동으로 향했습니다. 결국 박은 남편과 함께 부인마저 해코지했지요.”

큰 돈을 손에 넣은 박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정 사장과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한 뒤 그날 오후께 두려움에 떨고 있던 운전기사 이모(당시 32세)씨마저 같은 수법으로 죽였다.


금당 살인마 박철웅 ‘희대의 카사노바’

박의 범행에는 그의 친 남동생(당시 29세)도 가담했다. 지방 미술교사였던 박의 동생은 제자와 염문을 뿌린 뒤 해임 당하자 서울로 상경해 형에게 얹혀사는 신세였다. 우연히 형의 범행을 지켜본 동생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도와 시신 파묻는 일을 도왔다. 땅 속 깊숙이 묻힌 시신 세 구와 함께 범행 증거와 목격자는 모두 지워지는 듯 했다. 그러나 ‘완전범죄’ 같았던 박의 악행은 단 석 달 만에 꼬리를 잡혔다.

“박철웅은 범행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과정에서 한 가지 실수를 범했지요. 지나친 바람기와 여성편력이 결과적으로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겁니다.”

강 전 경정에 따르면 지방 태생으로 서울소재 명문대를 중퇴한 박은 엄청난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범행시기와 맞물려 동거녀 외에 이혼 경험이 있는 여교사와 교제 중이었다. 그런데 동거녀가 박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

“동거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같이 사는 남자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식의 하소연을 했더랍니다. 전직 공무원인 동거녀의 아버지는 인맥을 동원해 박의 뒷조사를 했고 과거 그가 전과자였다는 것을 비롯해 몇 가지 미심쩍은 정황이 밝혀졌지요.”

박의 과거가 의심스럽다는 소문은 머잖아 수사팀에도 흘러들었다. 이미 정 사장이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 박철웅이라는 것을 파악한 강 전 경정의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강 전 경정과 형사들은 박철웅의 집 앞을 며칠 밤낮 지켰지만 용의자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동거녀와 함께 아침 외출을 나가는 박을 따라 붙은 수사팀은 다짜고짜 이들을 인근 파출소로 데려갔다.

“지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그때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박과 동거녀를 따로 격리시키고 먼저 동거녀에게 죽은 정 사장 사진을 보여줬지요.”

피해자 사진을 본 여인의 입매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강 전 경정은 ‘제대로 짚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동거녀는 “이 사람이 남편(박철웅)과 함께 집으로 찾아와 내가 차를 끓여줬다”고 털어놓았다.

여인은 또 “나는 차만 내주고 집을 비웠다. 사람을 죽였다면 남편과 시동생이 저지른 일이다”며 울먹였다. 박의 남동생 역시 잠복 중이던 수사팀에 붙잡혔고 모든 것을 체념한 박은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대며 죄를 자백했다.

“살인마가 된 영악한 카사노바가 결국 사랑하는 여인에게 덜미를 잡힌 셈이죠. 결정적인 제보가 있기까지 녀석을 잡는데 꼬박 100일이 걸렸습니다. 시신이 나오는 순간, 머리끝이 바짝 곤두설 정도였지요.”

금당사건의 주범 박철웅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자서전까지 내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희대의 살인마이자 여심을 농락한 카사노바의 무용담은 호사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됐다.


‘60억 들고튀어라’ 광주 한국은행 갱사건

1965년 12월 30일 새벽. 한국은행 광주지점 금고가 쥐도 새도 모르게 털렸다. 현금과 외화를 포함해 약 6000만원 상당(현재물가 기준 약 60억원)이 사라진 금고 안에는 당직 경비원 3명이 손발이 묶인 채 갇혀있었다. 건장한 직원 3명을 간단히 제압하고 3개나 되는 두꺼운 특수 철문을 귀신같이 딴 솜씨에 수사팀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유래 없는 대사건에 전남경찰은 본부에 지원요청을 했고 당시 서울시경 강력반장이던 강 전 경정이 동료 4명과 함께 광주로 출동했다. 일명 ‘광주 한국은행 갱사건’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된 도난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때 머문 호텔 이름까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연락을 받고 그날 밤 9시쯤 광주에 도착해 K호텔 516호에 머물렀죠. 다음날 아침 일찍 동료들과 현장답사를 시작했는데 어딘가 이상하더군요.”

사건 당일부터 이튿날까지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은행의 높은 담은 손 댄 흔적하나 없이 말끔했다. 또 발자국이 남아있어야 할 마당에는 일부러 눈을 쓸어낸 자국이 있었다. 범인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었다.

“일단 현장을 꼼꼼하게 둘러본 다음 아침식사를 하러 은행 구내식당에 내려갔는데 우리 말고도 이른 식사를 하는 직원들이 있더군요. 다들 얼굴이 초췌하고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평범한 직원 같지는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범인들에게 제압당해 금고에 갇혔던 사람들이더군요.”

현지 경찰에 불려가 밤샘 조사를 받은 듯 사내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유독 형사들을 대하는 한 남자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은행 고용인으로 현금 주머니를 옮기는 일을 하던 심모(당시 34세)씨였다.

심씨는 형사들에게 ‘범인이 잡히면 어떻게 되느냐’ ‘서울에서 조사를 받느냐’ ‘형을 얼마나 살게 되느냐’ 등의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도저히 은행털이범에게 당한 피해자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는 이상행동에 강 전 경정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곧장 부하 형사를 시켜 심씨를 우리가 머무는 호텔 객실로 데려왔습니다. 이른바 ‘약식취조’를 시작한거지요.”

서울시경 소속 베테랑 형사들의 송곳 질문에 심씨는 당황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즉석에서 시작된 취조는 무려 8시간 동안 이어졌다. 마침내 형사들의 능란한 유도심문에 넘어간 심씨는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희대의 도난사건으로 수사팀 전원의 특진과 막대한 포상금이 걸렸던 광주 한국은행 갱사건은 은행직원 심씨가 일가친척과 함께 저지른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범행발생 34시간 만에 잃어버린 6000만원을 무사히 회수하며 깔끔하게 마무리 된 사건. 그러나 강 전 경정에게 있어 당시 소동은 여전히 뒷맛이 씁쓸하다.

“바로 다음해 광주지역에서 아주 큰 선거가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범인 검거의 공을 모조리 지역경찰이 싹쓸이 해가더군요. 약속했던 특진이나 포상금은 한 푼도 못 받았지요. 허허허. 그땐 그게 왜 그리 약이 오르던지…”

허허로운 웃음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짓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은퇴 이후 장학재단 이사로 변신한 강 전 경정은 수사관으로 활약하던 과거만큼이나 정력적인 삶을 살고 있다.

강 전 경정의 현재 공식적인 직함은 대한노인회 과천시지회장. 41년 동안 친정으로 여겨온 경찰을 떠난 뒤에도 세상을 밝히려는 그의 에너지는 여전히 발산중이다.


#리얼스토리 talk box
강찬기 전 경정


리얼스토리 연재 사상 최고령인 강 전 경정과의 만남은 세대를 뛰어넘는 흥미로움의 연속이었다. 60~70년대 국내를 뒤흔든 강력사건의 잔혹성과 스케일, 범인의 이상심리 등은 오히려 지금 세대의 상상을 뛰어넘는 듯 했다. 강 전 경정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서울시경 소속으로 일선 수사에 참여했으며 레이건 美 대통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여러 국빈 방한 때 경호업무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 10·26 사태 당시 어떤 수사를 주로 담당했는지. 또 당시 사건과 얽힌 비화가 있다면.
▶ 서울시경 강력반장 시절이었다. 관내 상황을 체크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출이 들어왔다. 자세한 상황은 생략한 채 ‘큰 유고가 있으니 당장 본부로 들어오라’는 명령이었다. 이튿날 새벽 서울시경 소속 형사 15명을 데리고 보안사로 들어갔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차출된 형사 가운데 따로 5명을 추려 육군본부 범죄수사대로 파견됐다. 3주 동안 전화는 물론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금지된 상황에서 수사만 했다. 그런데 얼마 뒤 나를 포함한 외부 파견 수사관들은 신분증을 회수당하고 수사팀에서 배제됐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당시 차지철(경호실장)씨 등 정권 고위층의 신원관계 파악을 주로 담당했다.


- 59년 ‘황 장로 사건’ 범인이 심장마비로 급사했다는 당시 보도는 거짓이라던데.
▶ 그렇다. 당시 언론에는 급사한 것으로 보도됐지만 사실 그는 자살했다. ‘황 장로 사건’은 교회 장로인 황모씨가 동거하던 술집 접대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집 부뚜막 밑에 묻어 유기한 사건이다.
서울 아현동에 있는 황 장로 집 부엌에서 주검을 발견했는데 입 가벼운 동료 형사가 용의자 앞에서 이 사실을 누설해 버렸다. 모든 죄가 드러났다고 낙담한 황 장로는 조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경찰 전체의 사기를 위해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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