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가 ‘조폭’ 잡고 보니 여중생, ‘7공주파’ 소녀들 지금 뭐하는지…”

임씨 토막살해 사건 관련 수사자료 중 일부.(좌) 98년 조폭 소탕 작전 당시 작성된 경찰 보고서.(우)

문민정부 끝자락인 지난 97년 6월. 본청에서 내려온 ‘특별임무’에 서울 영등포 경찰서 형사계는 벌집을 쑤신 듯 했다. ‘전국 조직폭력배(조폭) 일제 단속’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에 불을 켠 형사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덕에 경찰서 조사실에는 인상 사나운 사내들이 굴비처럼 엮여 들어왔다. 막 초여름에 들어선 날씨 때문일까. 껄렁한 고성이 오가는 경찰서 안은 형사들과 조폭들이 내 뿜는 열기로 푹푹 쪘다. 2개월의 특별단속 기간 중 6개 조직을 소탕해 35명을 잡아들였다. 나쁘지 않은 실적이다. 옛 ‘제자’(전과자)들에게 얻어낸 정보가 제법 쓸만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1년여 앞둔 50대 후반의 김길호 계장은 붙들려온 조폭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칫, 김 계장은 형사들의 끈질긴 취조에 질린 듯 인상을 쓰는 얼굴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도 너무 어린, 영등포에서 ‘한 가닥’ 한다는 행동대원들의 뺨엔 하나같이 보송한 솜털이 가득했다.

“너 몇 살이냐?” 그 중 한 녀석에게 넌지시 물었다. 힐끗, 김 계장을 올려다 본 소년은 다시 인상을 구기며 뇌까렸다. “…열일곱이요.” 얼씨구. 헛웃음을 흘린 김 계장은 대학생이 된 두 아들의 또래 시절을 떠올렸다. 입맛이 썼다. 소년들을 유치장에 몰아넣으며 김 계장은 생각했다. ‘격리와 처벌 말고 이 아이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이듬해 경정 계급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그는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같은 생각에 골똘히 빠질 때가 많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본부 앞에서 만난 김길호 전 경정(68)은 ‘전천후 수사통’으로 유명하다. 지난 1968년 경찰 공무원으로 입사해 서울시경 형사과와 보안과를 거쳐 남대문 경찰서, 서초 경찰서 강력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뒤 강원도 양구 경찰서 수사과장을 역임했다.

90년대 중반 다시 서울로 발령을 받은 김 전 경정은 영등포 경찰서 형사계장을 지낸 뒤 용산 경찰서 형사계장을 끝으로 지난 1998년 은퇴했다. 그럼에도 김 전 경정은 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 범죄수사 연구관 신분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김 전 경정은 현직 경력 30년 간 강력사건은 물론 90년대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로비사건과 39쇼핑 박경홍 사장 투신자살사건, 대한생명보험 최순영 회장 협박 사건 등 유명 기업인이 연루된 복잡한 사건을 연달아 해결하며 명성을 날렸다.


24살 두목, 17살 조직원 ‘막내파’ 하극상

“이 녀석들 잡을 때 고생 좀 했죠. 누구를 협박하고 어떻게 때렸으며 얼마를 뜯어냈는지 수사팀이 훤히 꿰고 있는데 정작 피해자들은 증언을 안 하는 겁니다. 보복 당할까 겁을 먹은 거지요. 영등포에서 ‘한다’하는 신흥 조직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는데 막상 붙들려온 녀석들은 새파랗다 못해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이들’이더군요. 기가 막혔어요.”

1997년 6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전국 조직폭력배 일제 단속을 명령했다. 당시 김 전 경정이 형사계장으로 근무한 영등포 경찰서는 2개월 동안 무려 6개 조직, 35명의 조직폭력배를 붙잡아 실적 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 전 경정은 그때 붙잡은 17살짜리 ‘어린 조폭’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검거한 영등포 일대 조직이 6개인데 그 중 3개 조직은 두목은 20대 초반, 조직원은 모두 10대였습니다. 이제 고1이 된 어린애도 있었죠. ‘막내파’, 조직이름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막내파 두목의 나이는 24살. 하지만 그는 이미 폭력전과 7범의 베테랑 깡패였다. 90년대 중반 와해된 S파에서 활동하다 조직 동료였던 2명과 ‘막내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각각 부두목(23)과 행동대장(21) 자리를 꿰차고 조직원 모집에 열을 올렸다. 끌어들인 신참 조직원들의 나이는 17~18살.

막내파는 영등포 중앙 삼각지 일대 유흥업소를 상대로 폭력과 협박을 일삼고 금품을 갈취했다. 신흥조직이었지만 상인들은 이들의 위세에 눌려 꼼짝 못할 정도였다.

“막내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라이벌 관계였던 ‘오페라파’ 역시 두목은 20살, 조직원은 18~19살에 불과했죠.”

약관의 나이로 오페라파 두목이 된 인물 역시 특수강도 등 전과만 9범에 달했다. 이들은 아예 지하창고에 무허가 술집을 차려놓고 취객을 상대로 대담한 범행을 저질렀다. 행동대원들이 호객꾼(속칭 삐끼)인 척 손님을 유인해 가짜 양주를 먹인 뒤 신용카드와 현금을 빼돌리고 정신을 잃은 피해자를 한적한 길거리에 방치한 채 도망치는 식이었다.

“아예 학교 ‘일진회’(교내 폭력서클)가 조폭으로 진화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두목이 21살인 ‘도웅파’가 딱 그랬습니다. 도웅파는 서울 도림동 일대 유흥가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합숙훈련까지 했죠.”

서울 모 중학교 선후배인 이들은 교내에서 ‘일진회’를 결성해 학생들을 폭행하다 모두 퇴학을 당했다. 이후 먼저 졸업한 두목과 부두목이 후배들 11명을 모아 탄생한 조직이 도웅파였다. 도웅파 조직원들은 회칼과 목검 등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등 어른 조폭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요즘 조폭 사관학교니 뭐니 말 많죠. 그런데 이미 10년 전부터 어린 조폭들은 활개를 쳤습니다. 제가 직접 잡은 ‘리틀 조폭’ 중에는 15살짜리 여중생도 있었어요. 이 아이들은 경찰서에 붙들려 와서도 선배가 오자 ‘안녕하십니까’라며 허리를 90도로 숙이더군요.”

지난 1997년 5월 조사실에 끌려온 7명의 여중생들은 자신들을 ‘7공주파’라고 소개했다. 이 밖에도 ‘좆밥클럽’ ‘진광파’ 등 이름도 요상한 중학생들이 조폭 흉내를 내다 유치장 신세를 졌다.


10토막 난 변사체, 세상 물정 모르던 27세 청년

김 전 경정은 약자가 범죄 피해자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약하다’의 의미는 비단 육체적인 근력만이 아니다. 세상 물정을 몰라 위기에 빠지는 피해자 역시 약자라는 게 김 전 경정의 생각이다.

그는 12년 전 10토막 난 참혹한 변사체로 발견된 한 청년의 사연을 들려줬다. 막 군을 제대한 피해자는 일자리를 주겠다는 광고를 믿고 집을 나섰다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이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넘어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습니다. 두 명의 범인들은 미리 준비한 수갑과 노끈으로 피해자를 꽁꽁 묶은 뒤 살해하고 시신은 모두 10조각으로 토막 내 세 곳에 나눠 유기했습니다. 돈벌러 간다고 나간 아들이 조각난 주검으로 돌아오자 피해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해 버렸죠.”

1997년 갓 제대한 임모(당시 27세)씨는 취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IMF 한파가 무섭게 몰아치던 시절, 신입 사원을 뽑는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루 종일 생활정보지를 뒤적거리던 임씨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사원모집-지입차량 용역직원을 모십니다’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운전병으로 복무한 임씨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광고를 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당장 면접을 보러 오라’는 사장의 말에 그날 오후 5시 쯤 의기양양하게 집을 나섰다. 지입차주 노릇을 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 중고 소나타 승용차까지 마련한 그는 서울 관악구의 한 허름한 빌라 앞에 차를 세웠다.

자신을 ‘사장’이라고 소개한 장모(당시 42세)씨와 직원으로 보이는 박모(당시 30세)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임씨는 장씨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씨는 특수강도 전과자였는데 미리 피해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 상태였습니다. 수사용 수갑을 보이며 ‘내가 잠깐 교도소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식으로 손을 묶는다’고 피해자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방심한 피해자가 장난삼아 손을 내밀자 장씨는 곧장 수갑으로 피해자의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단단히 묶였죠.”

졸지에 손이 묶인 임씨가 잠시 당황한 사이 박씨가 피해자의 두 다리를 노끈으로 있는 힘껏 동여맸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안 임씨는 발버둥 쳤지만 손발이 모두 결박당한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장씨는 역시 미리 준비한 검은 비닐봉지를 임씨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청테이프로 비닐봉지 입구와 피해자의 목을 있는 힘껏 감았다. 숨이 막힌 임씨는 반항한번 제대로 못하고 결국 질식사하고 말았다.

“더 잔혹한 건 그 다음입니다. 장씨 일당은 숨진 임씨를 목욕탕으로 옮기고 시신을 잘게 토막 냈죠.”

임씨가 범인들을 찾아온 지 8시간 만인 다음날 새벽 1시 일당들은 실톱으로 임씨의 시신을 썰기 시작했다. 그는 곧 머리, 팔, 다리, 손목, 발목이 잘린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장씨 등은 토막 낸 시신을 부위별로 신문지에 싼 뒤 큰 비닐봉투에 넣어 임씨가 몰고 온 소나타 승용차에 실었다.

날이 밝자 이들은 임씨의 차를 몰고 관악산으로 향했다. 낙성대 쪽 능선에 임씨의 머리와 팔, 다리를 묻은 범인들은 서울대 후문 쪽 산으로 자리를 옮겨 마지막 남은 몸통을 유기했다. 완벽하게 시신을 없앴다고 판단한 장씨 일당은 곧 임씨가 제 손으로 챙겨온 몇 안 되는 재산을 빼돌렸다.

범인들은 임씨의 자동차 종합보험을 해지해 55만원을 챙기는가하면 임씨 이름으로 된 직불카드를 이용해 약 1700만원을 갈취했다.

“사실 피해자 가족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범인들은 최악의 연쇄살인범이 됐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죠.”

일자리를 얻었다며 나간 아들이 그길로 소식이 끊기자 임씨의 모친은 경찰에 아들을 찾아달라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모친의 신고에도 임씨는 ‘가출자’로 분류돼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임씨의 행방이 묘연한 지 수개월이 지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수사팀은 본격적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생활정보지 구인 광고를 보고 나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어떤 회사 광고를 봤는지는 몰랐습니다. 결국 당일 배포됐던 생활정보지를 종류별로 수소문해 구했죠. 또 피해자가 실종되기 직전 차를 구입했고 이 역시 함께 사라졌다는 걸로 미뤄 승용차가 필요한 업체에 구직문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몇 가지 기준을 세우자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곧 상습 전과자인 장씨가 지입차 용역사원 모집공고를 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임씨의 통화기록 등을 뽑아보자 곧 장씨가 광고에 낸 전화번호가 나왔다. 임씨의 행방은 이미 손에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씨가 살고 있는 빌라를 급습하니 또 다른 청년이 ‘가짜 면접’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연행해 자백을 받아내고 다음날 두 곳에 묻힌 임씨의 토막 시신을 모두 수습했죠. 일당 중 박씨는 불법체류 중인 조선족이었는데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장씨 말에 넘어가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먹이로 삼은 끔찍한 사건이었죠.”

김 전 경정은 범죄자들이 모두 힘이 세거나 강한 악당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먹이로 삼는 사회가 문제’라는 심오한 지적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리얼스토리 talk box
김길호 전 경정

서울시경 보안과 정보통 출신이기도 한 그는 과거 대한생명보험과 39쇼핑(현 CJ홈쇼핑) 등 대기업들이 연루된 각종 범죄사건에도 일가견이 있다. 지난 1998년 39쇼핑 박경홍(당시 39세) 사장의 투신자살 사건과 같은 해 최순영 당시 대한생명보험 회장의 공갈협박 사건 등을 해결하며 재계에도 이름을 알렸다. 한편 그는 유독 어린이와 청소년 관련 범죄행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두 아들이 안겨준 네 명의 손주들을 볼 때마다 티 없이 맑은 영혼을 상처 내는 범죄에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전직 수사관 출신으로 범죄에 노출된 아이들을 돕는 원스톱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는 김길호 전 경정. 그와의 짤막한 일문일답을 모았다.

- 박경홍 39쇼핑 사장의 투신을 놓고 자살이냐 타살이냐 논란이 컸다. 사건의 진실은 뭔가.
▶ 박 사장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39쇼핑에서 가짜 에메랄드를 진품으로 속여 판매한 것이 적발되는 바람에 박 사장이 위기에 몰렸다. 특히 김영삼 정부 시절 급성장한 39쇼핑을 두고 정권이 바뀌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부의 압박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회사자금 운영 과정을 두고 박 사장의 비리를 캐기 위한 수사도 진행됐었다. 박 사장은 안팎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회사 7층에서 투신한 것이다.

- 최근 청소년 범죄가 더욱 연소화, 흉포화 되고 있다. 예방법은 없을까.
▶ 경찰생활을 오래하면서 특히 어린 초범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경찰 내부에서도 청소년 지킴이를 운영하고 경우회원들도 학교폭력예방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충분치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동과 청소년, 부녀자 등 범죄피해에 노출되기 쉬운 약자들을 위한 전문 상담소를 여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될 듯 하다. 나를 비롯한 전직 수사관들과 여경들이 범죄피해를 당했거나 가담했던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상담을 해주고 직접 현직 수사관들에게 사건을 이첩시켜 원스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재정적인 문제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지 않은가.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