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개 여신’ 음정희 두 아이의 엄마로 ‘아시아 인어’ 최윤희 틈틈이 수영해설

▲ <음정희> 사진출처-뉴시스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응답하라 1994’, ‘무한도전 토토가’ 등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방송 프로그램들로 인해 과거 인기스타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수 터보, 이상민, 이본부터 시작해 농구선수 이상민 등의 근황이 공개되고 연예계에 컴백하는 등 과거 추억의 스타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90년대 후반 스타뿐만 아니라 8090시절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들었던 추억의 스타들 근황도 궁금해졌다. 노래와 드라마뿐만 아니라 훌륭한 경기 실력으로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데뷔 37년 쎄시봉 출신 가수들 변함없는 음악사랑
인기 절정에서 엄마로 변신한 女 스타들 공개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쎄시봉’은 1960년대 한국 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일으킨 가수들의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서 일어난 사랑과 우정을 다룬다. 이 영화는 포크 음악계의 전설 이장희,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의 음악에 얽힌 실제 사연을 바탕으로 가상인물의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더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한국 포크계의 전설
식지 않은 음악 열정

‘쎄시봉’은 1953년 서울 무교동에 개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음악감상실로 음악을 좋아하던 젊은이들이 당시 이곳에 모여 통기타 라이브 연주를 하는 곳이었다. 이곳을거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등이다.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인 윤형주는 의과대학을 중퇴하고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 가요계에 데뷔한다. 트윈폴리오는 2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에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등의 노래를 발표해 10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뒤 윤형주는 솔로 가수로 전향해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심야프로 MC와 라디오 DJ를 맡기도 했다. 또 많은 CM송을 만든 작곡가 로도 유명하다. 윤형주를 비롯한 송창식, 조영남 등 쎄시봉 멤버들은 데뷔 37년차가 된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최고의 청춘스타에서
평범한 일반인으로

1989년 MBC 공채 탤런트 19기로 연예계에 데뷔한 배우 음정희. 그는 1991년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거머쥐며 차세대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후 드라마 ‘파일럿’ ‘나는 천사가 아니다’ ‘고백’ 등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음정희는 웃을 때 볼이 쏙 들어가는 보조개로 인해 ‘보조개 여신’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유학길에 올랐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한 살 연하의 인테리어 사업가와 결혼한다는 ‘깜짝 발표’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음정희는 2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됐다. 그와 동시에 브라운관에서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07년 부산 출신 사업가와 재혼을 하고 이듬해 딸을 출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현재도 음정희는 부산에서 아들과 딸을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에서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스타가 있다. 바로 가수 이지연이다. 그는 1987년 ‘그땐 너무 어렸나봐요’로 데뷔해 당시 김완선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이지연은 ‘바람아 멈추어다오’ 등으로 1990년까지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1990년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잠적했다가 1992년 귀국해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팬들은 돌아온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발매한 4집 앨범도 흥행에 실패했다. 결국 이지연은 연예계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현재는 요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미국 애틀랜타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1990년 결혼한 남성과는 결혼생활 18년 만에 이혼도장을 찍었으며, 그 후 요리학교 동창인 미국인과 약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의 스포츠스타에서
지금은 행정가로

1987년 K리그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에서 프로선수로 시작한 김주성은 데뷔한 해 신인상을 수상하고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차례 연속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에 뽑히는 등 명실상부한 K리그 최고의 에이스였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폭발적인 스피드와 현란한 개인기로 ‘야생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1992년 독일로 진출, VFL보훔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1994년 다시 국내 K리그 대우 로얄즈로 복귀했다. 국내 리그 복귀와 함께 포지션을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바꾼 김주성은 완벽하게 적응된 모습을 보이며 1994, 1997, 1999년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됐다. 1999년 리그를 마지막으로 김주성은 은퇴했다. 이에 소속팀은 김주성의 등번호 16번을 영구 결번했다.
은퇴 후 김주성은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부터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을 맡았고, 현재는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을 맡으며 후배들을 위한 행정가로 변신에 성공했다.

축구에 김주성이 있다면 농구에는 이충희가 있다. 전 농구선수이자 현 농구 해설위원인 이충희는 현역시절 ‘슛도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최강의 슈터였다.
중학생 때부터 농구가 좋아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충희는 1981년 현대전자 농구단에 입단하고 농구대잔치에서 한 경기에 50점대 득점을 하는 기록을 세우는 등 당대 최고의 농구 스타로 떠올랐다. 1982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따는 공을 세웠으며, 1986년 농구 월드컵에서는 평균 27점을 기록, 팀 내 최고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해외 농구팀에서 영입 제의가 있을 정도로 이충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대만과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한 뒤 결국 은퇴하게 됐다. 은퇴 후 이충희는 감독으로 변신했지만 화려했던 선수시절에 비해 성적을 내지 못했다. 결국 감독직을 사퇴하고 지금은 농구 해설위원으로 변신했다.

▲ <최윤희> 사진출처-뉴시스

아시안 게임 금메달
선수들은 지금 어디에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당시 여자 배영 100m, 200m, 개인혼영 200m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내고,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도 여자배영 100m와 2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수영선수 최윤희. 조오련 이후 10년 만에 아시안 게임에서 수영 금메달을 따낸 최윤희는 뛰어난 수영실력과 미모로 인해 당시 최고의 여자 스포츠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아시아의 인어’로 불리며 명실상부한 원조 국민 여동생 자리에 올랐다. TV방송에서 이온음료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1991년 밴드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당시는 최윤희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 때였다. 거기에 유현상이 최윤희보다 13세 많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둘러싼 각종 악성 루머가 쏟아져 나왔다. 결국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려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현재 두 사람에 대한 루머는 모두 사라졌고 현재는 연예계 잉꼬부부로 불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 최윤희는 틈틈이 수영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의 또 다른 스타는 바로 육상선수 임춘애다.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육상 800m와 1500m 3000m를 모두 석권하며 ‘육상스타’로 떠올랐다. 지금까지도 임춘애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당시 임춘애는 인터뷰에서 “라면을 먹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고 말했다. 17세 깡마른 몸으로 전력질주했던 임춘애는 ‘라면소녀’로 불리며 국민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임춘애는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한국육상그랑프리대회 등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대학 졸업 후 결혼식을 올린 임춘애는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이자,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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