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의 두얼굴

[일요서울 | 서준 프리랜서] 일반적으로 국제결혼은 국내에서 결혼을 할 여성을 만나지 못한 남성들의 훌륭한 대안이다. 또 농촌 총각들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여성이 늘어나고, 반면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있는 동남아 여성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국내에서도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점차 제도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안정화되어 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극히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이 국제결혼이 ‘변태적 성관계를 맺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문제다. 물론 외형상 정상적인 결혼이지만, 변태적 성생활을 즐기려는 남성들이 사회적 입지가 약한 외국인 여성을 통해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결혼한 사이에서 변태적 성관계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부 사이라고 하더라도 원치 않는 변태적인 성관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국제결혼과 변태적 성관계. 이 오묘한 두 가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집중 취재했다.

변태적인 성 욕구는 도시와 지방을 가리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엘리트 대기업 사원도, 농촌에 사는 시골농부도 비슷한 맥락에서 변태적 성관계를 원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골에서 이러한 변태적 성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도심에서야 변태업소도 많고 여자를 만날 기회도 적지 않지만 시골에서는 이것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이러한 변태적 성욕구의 위험성이 더욱 높은 것이 시골일 수도 있다. 한 유흥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끔씩 시골에서 서울로 놀러와 룸살롱을 찾는 경우도 있다. 사실 아가씨들의 불만이 높은 것은 오히려 도시 사람들보다 시골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 사람들이야 그럴 기회가 많으니 딱히 문제를 만들지 않지만 시골에서는 마음먹고 큰돈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가씨의 몸을 더듬는 일도 많고 진상을 부리기도 한다. 특히 2차를 갔을 때 변태적 성관계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시골사람들이 더 순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욕구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오히려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변태적 성관계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도시든 시골이든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변태적 성관계에 대한 포르노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곧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변태적 성 욕구 자체는 동일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욕구가 국제결혼을 통해서 해소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는 점이다. 실제 20세 아래의 여성과 결혼을 한 제주도의 한 선원이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관계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는 일이 있었다. 당시 49세의 남편은 애초부터 국제결혼을 할 때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풀 수 있는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 남성만이 문제는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국제결혼 자체를 변태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남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 국제결혼상담소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골사람들이라고 무시하면 절대 안 된다. 어떨 때는 도시 사람들보다 더 영악하고 자기이익 챙기기에 강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국제결혼을 통해서 여자들에 대한 한을 풀고 더 나아가 자신의 변태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대부분 한국에 오는 동남아 여자들은 최소 10세 차이는 감안하지 않는가. 솔직히 한국에서 10세 차이가 그리 쉽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심지어 동남아 여성들의 경우에는 20세 차이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오픈 마인드인데다가 어차피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속에서 은근한 변태적 성향이 자라날 수 있다. 자기보다 20살 어린 여자와 산다고 생각해보라. 이제까지 자기가 꿈꿔왔던 온갖 형태의 섹스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국제결혼은 학대나 폭력에 이어 변태적 성행위라는 또 다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결혼한 사이’에서 남자가 좀 특별한 성적 취향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을 ‘동남아 여성을 상대로 하는 변태적 성향’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부부들도 서로 합의만 한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섹스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변태적 관계’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비록 상대가 한국 생활에 익숙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성적 약자’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의 여성들이 20대를 넘은 상황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합당하지 않다. 한 남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솔직히 국제결혼을 하는 남성들은 또 그 남성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혼한 상대 여성의 집안까지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등 나름의 고충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이 원하는 섹스도 하지 못한다면 굳이 국제결혼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차라리 창녀촌에서 성적 욕구를 해결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지 않겠는가. 뭐하러 정부에서는 국제결혼을 합법화시켰으며 또 남성들은 상대 여성의 집안까지 책임지려고 하겠는가. 이는 남성에게 일방적이고 과도한 부담감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 여성이라고 해서 성적으로 변태적인 욕구가 완전히 없다고 가정하는 것도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 여성들도 약간의 변태적 성향을 가진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에서 동남아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남성의 변태적 욕망은 서로의 궁합을 맞추고 행복한 결혼생활, 성 생활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채 무조건 ‘약자인 동남아 여성은 순수한 섹스를 원하는 여자’라고 단정 짓는 것도 무리라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정작 이런 논의의 당사자인 한 농촌총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우리들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솔직히 자신이 원하는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이 아닌가. 이건 도시와 시골이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마치 농촌총각들이 의도적으로 변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10살, 20살 어린 동남아 여성과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솔직히 이제는 더 이상 농촌으로 시집을 오려는 여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이상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나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국제결혼은 지금보다 더 장려되어야 하고 또한 이것이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 또한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국제결혼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남아 여성들이 시골에서 하는 역할은 정말로 만만치 않다. 도시에서 동남아 여성들이 서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농촌에서도 동남아 여성들이 없으면 가정이 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어린 동남아 여성을 변태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극히 일부 남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또한 설사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동남아 여성들의 한국행 결혼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일은 썩 긍정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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