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는 세계 유행의 최첨단 거리 미국 뉴욕에서부터 하루 2달러로 끼니를 이어가는 인도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즐겨 입는 바지이다. 그러나 색상은 단 한 가지 청색이다. 청바지는 부자와 빈자,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노인, 새 것과 헌 것 구분없이 모두 즐겨 입는다. 색상이 바래거나 너덜너덜 해질수록 더 멋지다.

다만 냉전시대 동구 공산국가들은 청바지와 함께 서구의 퇴폐적인 자유사조가 묻어 들어온다며 단속했다. 그러나 청바지 구입이 어려워질수록 동구권 젊은이들은 청바지에 더욱 더 매력을 느꼈다. 청바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패션(의상유행) 혁명을 일으켰다.

청바지가 패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만큼 우리나라 국립민속박물관도 작년 10월부터 올 2월23일 까지 ‘청바지 특별전’을 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청바지 특별전’과 함께 청바지 학술대회도 개최했다. 이 특별전에는 ‘물질문화 연구’의 세계적 권위이며 세계 각국의 청바지 유행에 관해 연구하는 영국 런던대학(UCL) 대니얼 밀러 교수도 참석했다. 그는 “서울 거리를 지켜보니 런던처럼 행인의 절반 이상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청바지가 처음 태어난 해는 1873년 이었다. 미국 네바다 주 광산촌에서 광부를 상대로 옷 짓는 봉제가게를 운영하던 제이콥 데이비스 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데이비스에게 단골 손님 주부가 찾아와 남편의 바지를 주문했다. 이 주부는 제이콥에게 남편이 새 바지를 오래 입을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달라고 당부했다. 제이콥은 실밥이 터지기 쉬운 바지 주머니 양 끝에 구리 대갈못(rivet)을 박았다. 그밖에 터지기 쉬운 곳에도 추가했다.

제이콥은 구리 못 청바지의 독점을 위해 특허권을 출원코자 했다. 그러나 특허료 68달러(한화 7만원)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의류와 잡화상으로 돈을 많이 번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씨가 나타나 특허료 68달러를 지불하고 동업에 들어갔다. 리바이는 청바지 상표를 ‘리바이 스트라우스’로 등록했고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1873년이었고 그는 청바지 재벌로 컸다. 청바지 리바이는 그 후 142년간 세계 청바지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유태계 독일인 이다. 그는 1829년 2월26일 독일의 작은 농촌마을 부텐하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가호호 방문하며 옷가지와 잡화를 팔며 연명해가는 가난한 행상이었다.

리바이가 출생한 무렵 독일 정부는 유태인에게 불리한 규제를 만들었고 유태인들의 미국 이민이 시작되었다. 리바이 가족도 아버지가 1846년 폐병으로 사망하자 미국 이민에 나섰다. 뉴욕에서 자란 리바이는 성년이 되어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나가 의류와 잡화상을 운영, 큰 돈을 벌었고 그 재력으로 청바지 특허권에 투자,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리바이의 출생지 독일 부텐하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리바이 스트라우스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박물관에는 ‘청바지의 아버지’ 리바이의 일대기와 140여년간 생산된 리바이 청바지들이 전시되어있다.

돌이켜 보건데 청바지는 질실강건한 독일인의 정신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주의 미국인의 생활이 융합해 창조해낸 불멸의 패션이다. 청바지 탄생을 되돌아보며 작은 구리 대가리못과 68달러 특허 출연의 위력을 통감한다. 인류의 새로운 패션 길은 작은 광산촌의 봉제사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잡화를 팔던 행상의 아들이 열었다. 청바지 패션의 혁명은 튼튼하게 지어달라는 광산촌 촌부(村婦)의 요청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성실히 받아 들인데서 싹텄다. 청바지가 142년전에 남긴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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