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살인·진짜 사건’ 리얼 추리세계 발 디딘 2박3일

강영 중 공개된 실제 사건 현장

<서울 변두리 허름한 여관방. 막 소녀티를 벗은 젊은 여인이 적나라한 알몸뚱이를 드러낸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여인이 누운 침대 위에는 남자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 자국이 희미하게 찍혀있고 시신 주변에는 거칠게 찢긴 두루마리 휴지조각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퉁퉁 부어오른 여인의 목에는 있는 힘껏 짓누른 누군가의 손자국이 나있었다. 숨진 여인이 걸쳤던 미니스커트와 가죽점퍼, 핸드백 등은 얕게 물이 찬 욕조에서 발견됐다. 살인동기와 여인을 죽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용의자는 단 한명, 피해자의 동거남 뿐. 그러나 이 남자는 결코 범인이 아니다. 여러분이 수사관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그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찾겠는가.>

스릴러의 한 장면 같은, 흥미로운 의문부호에 강의실에 모인 50여명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곧 여기저기서 사건과 관련된 질문과 나름의 추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7년 전 ‘실제’ 있었던 살인극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논쟁에 경찰청 소속 감식 수사관과 국과수 최고참 연구원도 동참했다. 한여름 밤 서스펜스에 빠진 50명의 사람들. 한국추리작가협회(회장 이수광)가 주최한 ‘여름추리소설학교’에서 지난 22년 간 반복돼온 익숙한 풍경이다.


어색한 첫 만남, 그래도 추리가 좋다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지난 8일 오전 인천 삼목선착장. 서해의 정취를 느끼고자하는 피서객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 그곳에서 새로운 추리여행이 시작됐다. 올해 22회를 맞은 ‘여름추리소설학교’(이하 추리학교)는 한국추리소설작가협회(이하 추리작가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유일, 최대 규모의 미스터리 문학 전문 세미나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나는 조선의 국모다’ ‘잡인열전’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이수광 작가나 ‘여명의 눈동자’ ‘슬픈살인’ 등을 통해 국내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른 김성종 선생 등이 이번 여름추리학교에 총출동했다. 현직 작가뿐 아니라 실제 강력사건을 담당했던 거물 수사관들의 얼굴도 보였다.

대한민국 경찰사를 통틀어 ‘감식수사의 달인’으로 불리는 이삼재 전 총경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장을 지낸 최상규 박사도 이번 추리여행에 동참했다. 추리와 사건이 좋아 따라나선 일반 마니아까지 서해 장봉도에 마련된 추리학교 본부에는 모두 50여명이 ‘교수’와 ‘학생’ 신분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본지 취재팀도 추리학교 학생으로 일정에 동참했다. ‘전교생’ 앞에 뻣뻣이 선 채 인사를 건넨 뒤 식사를 마치자마자 본격적인 강의 일정이 시작됐다. 1교시는 ‘한국추리작가협회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영문학 박사 유명우 교수가 강의를 담당했다. 유 교수는 애거사 크리스티 등 해외 유명 추리작품의 국내 번안 선구자로 추리작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추리작가협회의 기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문학 교수와 엘리트 작가들을 중심으로 해외 추리작품을 수집하고 토론을 즐기던 ‘미스터리 클럽’(Mystery club)이 추리작가협회의 전신이다. 1980년대 초 동서문화사 편집실 한 쪽을 사무실로 개조해 정식 간판을 단 미스터리 클럽은 1983년 기존의 독자 위주 동호회에서 벗어나 전문 작가들까지 포용하는 ‘작가협회’로 변신했다. 추리작가협회가 주최하는 여름추리소설학교는 1988년 처음 문을 열었다.


‘리얼한’ 사실에서 훌륭한 작품 나온다

추리학교가 내세운 강의 일정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끈 과목은 바로 이삼재 전 총경이 진행한 ‘시건 현장감식의 실제’다.

일선 강력계 형사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사건 파일을 이 전 총경이 추리학교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공개하는 자리로, 일반인은 물론 기자들도 쉽게 접하기 힘든 국내 살인사건 현장의 감식 자료들이 고스란히 제공됐다.

살인사건에 대한 일반인의 호기심은 엄청나다. 하물며 사건과 서스펜스의 연속인 추리작품에 푹 빠진 이들의 집중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취재진 역시 강의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이 전 총경이 보여주는 슬라이드 필름 한 장, 한 장에 눈을 고정한 채 바쁘게 펜을 움직였다.

이날 이 전 총경이 공개한 것은 지난 1992년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김 순경 사건’과 2002년 서울 공릉동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노파 살해사건의 현장 감식 자료였다. 현직 경찰관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김 순경 사건’은 90년대 강력사건을 통틀어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렀었다. 서울 봉천동의 한 여관에서 여자친구를 목 졸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김 순경은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의 억울함이 증명되기까지는 꼬박 1년하고 17일이 걸렸다. 그나마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또 다른 강도사건을 저질러 운 좋게 자백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눈을 사로잡는 참혹한 살인현장의 비주얼 뿐 아니라 이날 이 전 총경이 소개한 두 개의 사건은 기막힌 연결고리로 묶여 참가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두 번째로 소개된 75세 노파의 참혹한 피살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는 숨진 피해자의 아들(당시 37세)이었다.

무엇보다 시신의 훼손 정도가 워낙 심해 친 아들이 이토록 참혹하게 어머니를 살해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술에 만취한 아들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한데다 외부 침입 흔적도 없어 그는 고스란히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로 몰릴 위기였다.

그러나 사건 발생 한 달 여 뒤 붙잡힌 범인은 전혀 엉뚱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아들의 회사동료이자 10년 전 김 순경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 진범과 동일 인물이었던 것. 10년 만에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죄를 남에게 덮어씌운 희대의 살인마가 등장하자 장내는 순식간에 술렁였다.

가장 훌륭한 스릴러는 현실에서 나오는 걸까. 최고의 추리소설을 꿈꾸는 이들의 뇌리에는 밤늦도록 두 건의 살인사건이 떠나지 않았다.

훌륭한 풍경과 맛좋은 음식, 스릴 넘치는 서스펜스가 함께한 여름추리학교는 강연 외에 추리퀴즈와 미스터리 영화감상, 학생들이 직접 짤막한 작품을 집필하는 백일장 등도 마련돼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작열하는 더위 속에서 만끽한 흥미진진한 추리의 세계. 여름추리소설학교는 내년에도 이어진다.

[사회부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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