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의 ‘기계’ 산통와중에 남의 지갑 손 댄 이유…”

85년 서울 동부 미용실 떼강도 사건 해결 당시 신문기사.(좌) 1986년 8월 ‘서진룸살롱’ 사건 당시 이양구 경감이 직접 조사한 가해자 서울 목포파(진석이파) 조직원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류들.

‘안테나가 망을 보면 바람이 돕고 기계가 턴다.’ (영화 ‘무방비도시’ 중에서)

1985년 3월. 꽃샘추위가 몰고 온 막바지 칼바람에 꽁꽁 옷깃을 여미면서도 서울시경 ‘치기반’(형사과 내 소매치기 등 특수절도사범 전담팀) 이양구 형사의 시선은 누군가에게 고정된 채였다. 전방 2시 방향, 젊은 남자 2명이 어깨에 핸드백을 걸친 여인에게 재빨리 따라붙는다. 슬쩍 동료에게 눈짓을 보낸 이 형사는 종로 한복판의 인파를 헤치고 그들의 뒤를 밟았다. 역시나. 잠시 주위를 살피던 남자들 중 하나의 손가락 끝에서 뭔가가 반짝, 빛을 낸다. 수사관의 눈썰미는 새파랗게 날 선 면도칼을 놓치지 않는다. 막 ‘기계’(소매치기 일당 중 직접 지갑을 터는 기술자)가 여인의 핸드백을 땄을 때 이 형사는 잽싸게 몸을 날렸다. 동료 역시 곁에 있던 ‘안테나’(망을 보는 조직원. 기계가 위험에 처하면 경호원이 되기도 함)를 덮쳤다. 현행범의 몸통을 꽉 죄어 안은 이 형사는 다짜고짜 놈을 바닥에 매쳤다. 소년티를 채 벗지도 못한 앳된 현행범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수갑이 매달린 허리춤에 막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화끈. 날카로운 통증이 이 형사의 등과 어깨를 쭉 가로질렀다. 동시에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비슷한 고통이 반대쪽 어깨를 쑤시고 들어왔다. 날이 긴 회칼에 당한 것 같았다. 이윽고 십여 개는 족히 넘는 주먹과 발이 이 형사의 몸으로 쏟아졌다. 일당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걸 계산하지 못한 게 실수다. ‘그 XX들 잡기 전엔 사무실 들어올 생각도 말아!’ 수일 전 상관의 서슬 퍼런 일갈이 뇌리를 스쳤다. 결국 밑에 깔린 녀석을 끌어안고 무조건 몸을 숙였다. 야속한 동료는 칼부림에 놀라 내뺐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막내딸 생각이 난 순간, 검은 ‘거미문신’을 새긴 두툼한 팔뚝 하나가 그의 옆머리를 갈기고 떨어졌다. 시뻘건 선혈이 빛바랜 보도블록을 흥건히 적시는 게 보였다.

“그때 죽었으면 오늘 이 기자 만날 일도 없었겠지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수사연구관실에서 만난 이양구 경감(62)은 당시 위기일발의 상황을 털어놓으며 허허롭게 웃었다.

지난 2006년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계장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이 경감은 30년 형사 경력 가운데 상당 기간을 조직폭력 수사와 소매치기 검거에 주력했다. 그는 이때 습격으로 정확히 34바늘을 꿰매고 왼쪽 엄지손가락 신경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마침 종로경찰서 형사기동대가 출동해 막아주지 않았으면 처자식 두고 저세상 갈 뻔했지 뭡니까. 우리가 본 일당은 두 놈이었는데 녀석들 뒤에 다른 조직원 7명이 따라붙고 있다는 걸 모른 겁니다.”

기동대가 뜨자 나머지 일당은 꽁무니를 뺐고 잡힌 건 그가 죽어라 물고 늘어진 기계뿐이었다. 범인을 기동대에 넘기기 전까지 이 경감은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가 자기 것이란 걸 눈치 못 챘다.

“혹시 밑에 깔린 놈이 다쳤나싶어 수갑을 채우고 이쪽저쪽 몸을 뒤집어가며 살폈지요. 그런데 멀쩡하더라고. 안심하고 얼굴을 쓱 훔쳤는데 끈끈한 피가 왈칵 묻는 겁니다. 손이랑 팔도 너덜너덜하고. 그제야 ‘내가 다쳤구나’ 싶었죠.”

인근 정형외과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이 경감은 곧장 경찰병원으로 후송됐다. 다행히 칼날은 급소를 피했지만 전치6주 진단이 나왔다. 일단 병실에 몸을 눕힌 그는 후배형사를 시켜 집에 전화를 걸게 했다. 노모와 어린자매, 젖먹이 막내까지 돌보느라 고생하는 아내가 걱정할까 ‘지방 출장 간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설마 다음날 조간신문 사회면마다 ‘서울시경 형사, 범인 검거 중 중상’ 기사가 도배될 줄은 몰랐지요. 기사를 본 고향선배가 집에 안부전화를 하는 바람에 아내가 더 충격을 받았지 뭡니까. 부인이 그때 후배형사를 아직도 원망해요.”


막내딸 첫돌에 떼강도 12명 일망타진

병실로 한달음에 달려온 아내를 겨우 진정시키고 나니 그는 묘한 억울함에 시달렸다. 6·25 때 홀몸으로 월남한 어머니 밑에서 청년시절 장사로 잔뼈가 굵었던 이 경감은 여태 주먹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어디 가서 남한테 죽도록 맞아본 역사가 없는데 그날 아주 형편없이 당한 것 아닙니까. 오기가 생기더군요. 결국 보름도 안돼 병원을 뛰쳐나와 시경으로 복귀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선언했죠. 앞으로 딱 한 달, ‘그놈들’만 찾겠다고.”

놈들에 대한 자료는 이미 충분히 수집한 상태였다. 이 경감은 일당이 서울 동대문 운동장 인근에 터를 잡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잠복에 들어갔다. 그때 달아난 일당이 최근 소매치기에서 업종을 바꿨다는 정보도 있었다.

“며칠 동안 동대문 인근을 이 잡듯 뒤져 녀석들 중 한 명을 붙잡는데 성공했습니다. 팔에 검은 거미문신을 한 바로 그놈이었지요. 형사과 치기반 멤버들이 돌아가며 녀석을 족친 끝에 나머지 용의자들의 은신처를 알아냈습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이 경감이 습격 당한지 정확히 40여일 만에 해당 조직원 12명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 날은 이 경감 막내딸의 첫돌이기도 했다.

“오랜 원수를 갚은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죽을 고비 넘기고 나서 내 손으로 놈들을 쓸어버리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더군요. 마침 놈들을 검거한 날이 셋째 첫돌이라 아예 시경 사무실에서 잔치를 벌였죠. 조사받던 범인들도 껴서 축하를 해주고… 하여간 묘한 자리였습니다.”

한편 이 경감이 검거한 일당은 소매치기 뿐 아니라 서울 동부를 무대로 수십 차례에 걸쳐 떼강도 행각을 벌인 진범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여성 혼자 운영하는 미용실 등만을 노려 금품을 빼앗고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이듬해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서른, ‘노땅’ 신참이 사는 법

경찰청 101단 출신으로 서울 성동경찰서에서 형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동기들보다 유독 나이가 많다. 1976년 서른 살 되던 해 경찰에 입문한 이 경감은 4살 이상 어린 동기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이 경감의 모친은 평안남도 원산 출신으로 6·25때 월남해 충북 청주에 터를 잡았다. 홀어머니를 도와 이 경감은 학창시절부터 장사를 했다. 수완이 좋았던 그는 20대 때 서울 중곡동에 번듯한 양옥집을 장만할 만큼 잘나갔다.

“그런데 어머니는 외아들이 장사꾼으로 사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떼돈 벌 필요 없으니 직장생활을 해보라’시기에 고르고 골라 선택한 직업이 경찰관이었죠. 유도 4단에 격투에도 자신이 있어 형사가 됐습니다.”

경찰이 되기로 맘먹은 순간부터 이 경감의 머리 속에 금전적인 부담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수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정말 죽어라 일만했습니다. 제가 첫 근무를 한 성동서에 형사만 50명 있었는데 검거 실적만큼은 늘 톱을 달렸죠.”

서른 살 ‘노땅’ 신참이 살아남는 법은 바로 일, 수사에 미치는 것이었다. 범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피 칠갑이 된 게 2번, 추격전 중 달리는 차에 치인 게 3번이다.

특히 86년 조흥은행 반포지점 현금도난 사건 용의자를 쫓기 위해 이 경감은 범인의 연고지인 부산 전포동까지 출동했다. ‘이 반장이랑 잠복 나가면 개고생이다’는 걸 뻔히 아는 형사들이 슬슬 피하는 통에 수사팀 막내 두 명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경감과 동행했다.

“용의자 남동생을 구슬려 어찌어찌 놈을 유인했는데, 참나 피가 그래서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까. 범인이 나타나자 그 동생 녀석이 ‘형 빨리 튀어라!’하며 초를 치더군요. 후배들이 어물거리는 동안 범인 뒤통수만 쳐다보며 죽어라 뛰었습니다.”

돈 낭비 하지 말라며 복귀하라는 본부를 가까스로 설득해 부산에 눌러 앉았는데, 여기서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공장길을 요리조리 피해 달아나는 범인의 뒷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붙잡기 직전, 달리던 택시가 그들을 덮쳤다.

“다행히 택시 속도가 빠르지 않아 큰 사고는 면했지만 충격이 상당했습니다. 차에 받혀 절뚝거리는 범인을 덮쳐 수갑을 채우는데 갑자기 택시 기사가 제 목덜미를 휘어 쥐더군요.”

범인을 추격하던 형사가 택시에 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망가진 건 오히려 택시였다. 기사는 범인 호송 중인 이 경감을 쫓아 부산 북부경찰서 수사실까지 따라 들어왔고 결국 수리비조로 당시 7만원을 받아갔다.


여자 소매치기들 ‘야당’에 몸로비

범인들이 휘두른 주먹이나 칼에 다친 게 여러 번, 그래도 가엾은 전과자들의 가슴 짠한 사연에 눈시울이 시큰거린 적이 더 많다.

이 경감은 80년대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소문난 ‘상급기계’였던 박현경(가명·당시 34세)여인과의 일화를 꺼내놓았다.

“형사들 사이에서는 ‘여자 소매치기가 형무소에 가면 꼭 애를 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임신한 상태로 감옥에 들어가 그곳서 출산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는 얘기죠.”

이 경감에 따르면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속칭 ‘야당’의 핏줄이다. 소매치기 구역의 관리자인 이들은 소매치기 세계의 ‘대부’(代父)격이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상납금을 받고 구역 내 치기범들을 보호하며 관할 경찰관들과도 인맥이 두텁다. 때문에 소매치기들은 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여자 소매치기들은 야당에게 ‘성상납’을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는 탓에 임신을 하면 대부분 중절수술을 받는다. 하지만 일단 경찰에 붙잡히면 이마저 도리가 없는 것. 아이를 가진 사실조차 모른 채 감옥에 들어간 여자 소매치기들은 배가 부르고 나서야 임신한 것을 깨닫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 남대문에서 활동하던 기계들 중 현경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여자 소매치기단 중 최고였던 ‘칠공주파’ 후계였는데 전과만 8범이었죠. 나한테만 두 번을 잡혔으니. 그때 붙잡아 서울구치소에 보냈는데 나중에 임신 중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동안 여인의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중 여느 날처럼 동료와 치기단속을 나간 자리에서 이 경감은 박 여인을 다시 만났다. 퉁퉁 부은 얼굴에 남산만한 배를 안은 여인은 한 중년부인의 핸드백을 따기 직전이었다.

“만삭의 임산부가 ‘빽따기’(핸드백 열기)를 하려는 걸 현장에서 붙잡아 일단 끌고 갔는데 기분이 찜찜한 겁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따라오던 여인이 그제야 절 올려다보며 ‘오빠야…’이러더군요. 현경이었습니다.”

사정은 이랬다. 산달이 다가와 구치소에서 당시 서울 동부시립병원으로 옮겨진 박 여인은 당장 태어날 아기를 건사할 길이 막막했다. 피붙이 하나 없는 그의 유일한 기술은 타고난 손재주 뿐. 당장 아기 기저귀 값이라도 마련하고 싶었던 엄마는 산통이 오는 와중에도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멀리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병원 코앞에서 도둑질을 했겠습니까. 단돈 몇 천원이라도 만들 생각에 정신없이 나온 것 같더군요. 실제 훔친 것도 없고 해서 제가 일단 아기용품을 대강 마련해 병원으로 돌려보냈지요.”

무모하리만큼 우직한 수사스타일로 ‘곰’ 형사의 전형으로 불렸던 이양구 경감의 눈빛에선 수사관이기 앞서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겼다.



리얼스토리 talk box 이양구 경감

“떼강도에 성폭행 당한 올케·시누이 끈끈한 우애에 감동”


셋째 딸 첫돌에 맞춰 일망타진한 12인조 떼강도 사건은 이 경감의 형사인생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당시 범인들은 17~19세의 소년들이었기에 네 자녀의 아버지인 이 경감은 유독 자녀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 이 사건으로 주범을 비롯해 일당 3명이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다.
▶ “80년대 상당히 큰 사건이었다. 10대 떼강도 사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한 명이 먼저 점찍어 둔 가게에 들어가고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나머지 일당이 밀고 들어가 강도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신고를 막기 위해 여주인을 집단 성폭행하기도 했다.”

- 피해자 진술을 받기 어려웠을 것 같다.
▶ “성폭행 사건이 대부분 그렇다. 특히 한 미용실 주인의 사연은 더 딱했다. 당시 올케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시누이가 퇴근길에 잠시 들러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놈들이 닥쳤다. 시누이와 올케는 일당에게 동시에 강간당했다. 나중에 피해자 진술을 들으러 찾아갔는데 20대 중반의 시누이가 날 붙잡고 울면서 비는 게 아닌가. 시누이는 ‘우리오빠 성격이 보통이 아니다. 언니가 그런 일을 당한 걸 알면 오빠가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나 혼자 당한 걸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간청한대로 조서를 썼다. 언론에도 이 같은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 네 자녀의 아버지다. ‘형사아빠’의 특별한 자녀교육법이 있는가.
▶ “험한 사건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내 아이들의 행실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딸 셋에 막둥이 아들 하나를 뒀는데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통행금지 시간(밤 10시)은 꼭 지키게 했다. 또 돈 쓰는 것에 있어서는 절대 헤프지 않도록 했다. 워낙 아이들이 착해 이 밖에 특별히 야단치거나 가르친 적은 없다. 공부도 곧잘 해 큰 딸은 덕성여대 심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막내딸은 유학에서 돌아와 올해 일본계 기업에 취직했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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