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개헌 역설’… “5년 동안 뭘 하느냐” JP 한 마디

대통령 사촌언니 박 여사의 ‘조용한 내조’

[일요서울ㅣ박형남 기자] 지난 2월 21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갑작스런 부인상이 전해졌다. 김 전 총리 아내인 박영옥 씨는 이날 오후 8시 43분경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 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사망했다. 박씨는 2014년 9월경 이 병원에 입원해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되자 김 전 총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등 휠체어를 타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5일간 거물급 정치인들 발길도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총리가 정치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헌 문제를 꺼내는 등 마지막 ‘황혼 정치’를 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수다한 물음에도 소이부답(笑而不答:웃음을 띨 뿐 답하지 않음)하던 자, 내조의 덕을 베풀어 준 영세반려(永世伴侶:끝없는 세상의 반려)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아내 박영옥 여사를 먼저 보내면서 손수 지은 비문이다. 김 전 총리의 아내 박영옥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 씨의 장녀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사촌지간이다. 박 씨는 박 전 대통령의 주선으로 김 전 총리와 결혼했고, 정치조언자로서 일생을 보낼만큼 남편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실제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92년, 김 전 총리가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되자 박 씨는 박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구명을 부탁했을 정도다.

빈소 가득 채운 조화

그의 비보가 전해지면서 정치권에서는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달 22일 오전 빈소가 마련되자 박근혜 대통령,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정의화 국회의장,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안희정 충남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조화와 근조기를 보냈다. 빈소 복도를 가득 채운 조화는 화장실 앞까지 놓여졌고, 다른 조화와 겹쳐놓을 정도였다.

이날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인사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 비서실장 신분으로 빈소를 찾았다. 이날 ‘포스트 JP(김종필)’로 불리는 이완구 국무총리, 이명박 전 대통령, 김효재 전 정무수석, 황우여 사회부총리,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이 조문했다.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 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주호영·김영우·심윤조 의원, 성완종 전 의원이 빈소를 찾았다. 야권에서는 문재인 대표, 우윤근 원내대표, 양승조 사무총장, 유인태·김영록·서영교 의원이 첫날 문상을 왔다.

23일에도 조문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희호 여사는 오전 11시 55분경 박지원 의원과 김대중평화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회창 전 총재, 고건 전 총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강창희 전 의장, 윤병세 외교장관, 김한길 전 대표, 탤런트 강부자, 가수 하춘화 씨 등 200여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이희호 여사는 조문 자리에서 김 전 총리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참 여사님이 덕이 좋았는데, 몇 번 만나 뵙고 선거 때는 같이 다니기도 했고 그랬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전 총리는 “(이 여사가) 건강하셔야 돼요. 가신 어른(김대중 전 대통령)분 몫까지 더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화답했다.

이날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빈소를 찾으면서 취재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대신 조문하는 형식을 취할 것으로 보였으나 박 대통령이 전격 방문했던 것. 더구나 박 대통령과 사촌형부인 김 전 총리와의 정치적 악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더욱 관심을 모았다. 김 전 총리가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박 대통령에게 참여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김 전 총리는 DJP연합을 이뤘고,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입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달리했다. 2007년 대선 때 김 전 총리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김 전 총리가 2012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씨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적 화해를 갖는 자리가 됐다는 시각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비공식 일정으로 조윤선 정무수석과 민경욱 대변인이 수행해 빈소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조문 후 김 전 총리와 딸 예리 씨와 함께 10여분간 비공개 환담을 가졌다. 환담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정진석 전 의원은 “박 대통령이 김 전 총리의 손을 잡고 ‘건강을 잘 챙기시라고’ 위로하자 김 전 총리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어 김 전 총리는 “대통령께서 와 주셔서 언니도 참 기뻐할 겁니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라고 했다.

JP의 ‘조문정치’

거물급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지면서 김 전 총리의 발언에도 관심이 쏠렸다. 조문을 하는 과정에서 김 전 총리가 정치인들에게 뼈 있는 충고를 건네며, 훈수 정치와 함께 마지막 황혼정치를 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추측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선 수긍하는 분위기다. 김 전 총리가 민감한 정치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특히 개헌 부분이 눈길을 끈다. ‘내각제 개헌론자’인 김 전 총리는 19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합의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후 파기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총리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구성 등 개헌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을 역설했다. 

김 전 총리는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에게 “내각책임제를 잘하면 17년도(2017년 정권 교체를 지칭),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우리나라는) 5년 대통령 단임제를 하지만 5년 동안 뭘 하느냐. 시간이 모자란다”며 “대처(전 영국 총리)가 영국에서 데모하고 파업하는 것을 12년 (재임)하면서 고쳤다”고 강조했다. 김 전 총리가 개헌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각제 필요성을 마지막으로 설파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편, 김 전 총리는 부인 박 여사의 장례식을 마친 이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부인의 영정사진만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측근인 정진석 전 의원은 지난달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전 내내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부인의 영정을 바라보는 김 전 총리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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