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서 사기꾼으로 소문난 여자 말 어떻게 믿나”

지난 9일 SBS '뉴스추적'에 방영된 조광현씨 인터뷰 캡쳐.

지난주 <일요서울>이 보도한 ‘필리핀 가정부 피살사건 내막’(본지 803호 41면)과 관련, 새로운 사실이 본지 취재결과 포착됐다. 2005년 11월 조씨가 자신의 집에 침입해 금품을 훔치고 현지인 가정부(여·당시 26세)를 죽였다고 지목한 진모(44)여인이 최근 사기혐의로 경찰청 외사국에서 집중 조사를 받은 것. 진 여인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는 현지 환전업자인 동포사업가 P씨다. 그는 지난해까지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인천공항세관에 수배된 상태였다. 그러나 올해 ‘진 여인의 사기행각을 밝히겠다’며 자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인천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P씨는 경찰에서 진 여인에게 속아 1억3000여만원을 떼였다고 주장했다. 4년 전 조광현씨가 연루된 살인사건과 이번 고소공방 내막에 앞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현지교민들 사이에서 진 여인에 대한 평판이 극도로 좋지 않다는 것. 기자와 접촉한 교민들 가운데 한 인사는 아예 진 여인을 ‘사기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며 맹비난했다. 그는 2005년 가정부 피살사건 당시 필리핀 경찰이 진 여인을 유력한 증인 삼아 조씨에게 살인혐의를 확정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으로 진 여인의 개인 경호원이었던 조씨는 높은 이자를 준다는 말에 평생 모은 8만 달러(약 9700만원)를 그에게 맡겼다고 주장해왔다. 조씨의 사연은 지난 9일 SBS TV ‘뉴스추적’을 통해 국내에도 알려졌다. 방송 이후 필리핀 교민들 사이에서는 진 여인이 ‘어떤 목적’을 갖고 조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을지 모른다는 섣부른 추측마저 돌고 있다.

경찰 관계자와 현지 교민들에 따르면 진 여인은 내연남 J씨(52)와 부부행세를 하며 교포들을 상대로 크고 작은 채무관계를 맺었다. 문제는 진 여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하고 이를 고스란히 뜯긴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개인사업을 하는 모 인사는 “진 여인에게 당한 피해자가 상당히 많지만 정식으로 고소하면 떼인 돈을 영영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속으로만 앓고 있다”고 전했다.


“잘나가는 카지노 사장행세, 깜빡 속았다”

사기 피해를 입었다는 P씨 주장에 따르면 진 여인은 J씨와 함께 지난 2002년부터 필리핀 마카티 시티에 있는 P씨 사무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진 여인은 자신들을 ‘R카지노 업주’라고 소개하며 P씨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카지노 ‘업주’가 아닌 소속 ‘에이전트’(고객을 상대로 환전업무 대행 등 편의를 제공해주는 직원)에 불과했다.

진 여인은 P씨 부부를 R카지노로 초청해 VIP룸으로 안내하는 등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P씨의 부인은 경찰에서 “진 여인이 VIP룸을 소개하며 ‘우리가 운영하는 카지노’라고 말해 믿었다”고 진술했다.

2002년 6월 진 여인은 P씨에게 “우리 카지노에 투자하면 매달 10%의 이자와 배당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만약 카지노가 문을 닫으면 원금을 한꺼번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솔깃한 제안에 P씨는 같은 달 11일 1만 달러(약 1250만원)를 미화로 건넨 것을 시작해 2003년 7월 중순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모두 1억300만원을 투자했다.

투자금은 진 여인의 내연남 J씨에게 직접 수표나 현금으로 건네지거나 국내 제일은행, 우리은행 등에 개설된 타인 명의 계좌를 통해 원화로 전달됐다.

투자를 한 처음 3개월 간 진 여인은 P씨에게 매달 약 500만원씩 이자를 송금했다. 하지만 이후 진 여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이자를 단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담당수사관 잘 아니 2000만원 달라”

2003년 9월 마침내 결정타가 터졌다. P씨가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경찰청 외사3과에 구속된 것. 그런데 진 여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P씨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뜻밖의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P씨 아내는 경찰 진술에서 “진 여인이 ‘외사과 담당 수사관과 절친한 사이’라며 ‘2000만원만 보내주면 남편을 빨리 빼주겠다’고 해 돈을 보냈다”고 말했다.

P씨의 아내는 남편이 구속된 지 닷새만인 2003년 9월 24일 윤모씨 명의로 된 우리은행 계좌로 2000만원을 송금한 사실이 경찰 수사 결과 확인됐다. 해당 계좌는 진 여인이 환치기 목적으로 제3자 명의를 빌려 개설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이 같은 혐의에 대해 진 여인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며 펄쩍 뛴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조사에 응한 그는 카지노 업주를 사칭해 투자금을 뜯었다는 P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구속된 남편의 무죄방면을 미끼로 P씨 부인에게 돈을 요구한 적도 없다고 항변했다.

진 여인은 경찰조사에서 “(P씨에게)카지노 운영자가 아닌 에이전트라고 분명히 소개했고 내가 관리하는 자금을 운용해 배당금을 주겠다고 한 것을 그쪽이 착각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P씨에게 매달 500만원씩을 이자로 줬다며 계좌내역을 증거로 내보이기도 했다.

한편 진 여인과 P씨 사이에서 돈가방 역할을 한 내연남 J씨의 정체 역시 베일에 싸여 있다. 사기, 횡령 등 전과 5범인 J씨는 지난 2001년 10월~2003년 3월까지 R카지노 관리이사로 일했다.

R카지노가 폐업한 이후 지난해까지 J씨는 필리핀 한 도시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현재는 세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J씨는 현지 여성과 결혼했으며 지인들에게 ‘부인의 큰아버지가 세부지역 모 시장(市長)’이라며 자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교민은 “J씨가 최근 투자금만 6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손댔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며 “부인이 지역 시장의 조카라는 점을 내세워 현지 사업가들과 자주 만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광현씨 내달 2일 석방 여부 가려질 듯

지난 2005년 현지인 가정부 A씨(여·당시 26세)를 살해하고 금품을 훔친 혐의로 붙잡힌 조광현씨에 대한 보석 신청 재판이 오는 10월 2일 오후 2시(현지시각)에 열린다.

4년 전 필리핀 경찰은 진 여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살인혐의를 확정해 공항에서 조씨를 체포했다. 그러나 검거당시 조씨의 손과 옷가지 등에서 화약반응이 발견되지 않는 등 그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조씨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얘기다.

경찰청 외사국 관계자에 따르면 조씨는 그동안 통역도 없이 현지인 변호사와 재판을 진행해왔다. 영어가 서툰 그는 담당 변호사에게조차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방송을 통해 그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자 동포들이 나서 그의 방면을 추진하고 있다. 현지 교민단체는 필리핀 법원에 조씨에 대한 보석신청을 하는 한편 통역관을 자처해 그의 재판 과정을 돕고 있다.

조씨의 보석 여부를 결정할 재판은 당초 이달 11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재판 당일 현지에 폭우가 내려 다음달 2일로 일정이 연기됐다.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조씨는 20만 페소(약 500만원)만 내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전 재산을 잃고 4년 동안 감옥생활만 한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라는 것이다. 변호사 선임비용까지 합쳐 조씨가 석방되는데 필요한 액수는 35만 페소(약 900만원) 정도다. 현지 교민단체는 십시일반으로 15만 페소를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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