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처음 세워진 고궁박물관

나는 청와대 교문수석실 김정남 수석에게 여러 가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난 “총독부 철거 이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장기간 폐관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새 건물을 짓고 이사하고 개관하기까지 10년쯤은 걸릴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원활히 박물관 사업을 운영하도록 우선 들어갈 수 있는 박물관을 지울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5000년의 긴 왕조문화를 지켜온 나라다. 그런데 그 긴 역사문화를 보존하고 소개할 박물관 하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경복궁 서남쪽 모퉁이에 들어서있는 옛 정부후생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왕궁 박물관을 건립하는 게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리고 “거기 우선 중앙박물관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전시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총독부를 철거도 하고, 새 박물관도 건립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그 생각도 흔쾌히 받아드리면서 “나도 도울 것”이라며 “장관과 협의해 확정하고, 예산확보에 주력해 건물 설계와 사공에 만전을 기해 달라”는 당부도 들었다. 그래서 겨우 남아있는 왕실 유물을 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 할 수 있는 지금의 고궁박물관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지어졌다. 
 
또한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거기서 전시 조사·교육 업무, 용산 신축박물관 건립사업 수행, 중앙청 철거사업을 진행했다. 이런 중에도 총독부 철거문제는 언론에서 국회에서 찬반논란이 계속됐다. 모 언론에서는 엉뚱한 문제를 가지고 본인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그때 모 언론은 “독일 해외 문화재전시 때 유물을 가지고 가서 훼손”했다느니 “귀중한 유물을 전시도 하지 안 하고 창고에 처박아뒀다” 같은 허무맹랑한 모략과 중상을 일삼았다. 아무리 해명을 해도 들을 생각도 안 했다. 언론에 그런 기사만 나가고 해명기회가 없으니 본인만 큰 곤욕을 치르게 됐다. 
 
국회에서도 국정감사나 해당 상임위원회 때마다 “박물관장, 철거를 강행해야 되겠소. 수천억 원을 들여 그 위대한 석조건물을 철거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요새 기술이 좋으니 그 건물을 그대로 지하에 보존하는 방안은 없소?”라며 별의별 공격을 당했다. 여당에서는 다른 문제를 제기하지만, 총독부 철거문제는 크게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민주당에서는 처음에는 크게 반대하지 않다가 철거가 임박할 즈음에 갑자기 돌변해 모두가 한 목소리로 철거를 반대하고 나섰다. 날선 질의와 공격이 있었다. 그때 참으로 신기하고 의연한 발언이 민주당에서 나왔다.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은 “나는 총독부 철거를 찬성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내놓은 시책 중 가장 뜻있고 훌륭한 시책이 바로 총독부 철거 사업”이라며 “이로 인해 우리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라고 했다. 민주당 의석에서 야유가 나오고 공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박 의원은 의연하게 “당신네들이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철거를 적극 지지하오”라고 말했다. 
 
총독부를 철거하라는 소식이 국내외에 퍼져 나가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요가 갑자기 크게 늘었다. 일본인 남녀노소와 학생단체가 줄을 이었다. 모두가 총독부 건물 앞에서 으스대는 모습이었고, 아쉽고 애석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본인들은 총독부건물 앞부분의 동남쪽 모퉁이 밑 정초석(定礎石)에서까지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초석은 관장실 앞과 옆의 모서리였다. 일본인들이 거기 와서 수 없이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서 “왜 정중앙에서 찍지 아니하고 구석진 곳에 와서 찍는지 이상하다”고 물었다. 그랬더니 직원의 이야기가 “그곳에 정초석이 있습니다”라고 한다. 나가보니 박물관장도 모르는 정초석을 그들이 찾아내 그곳까지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수 없이 바라보는 감회는 남달랐다. 
 
저들에게 이 건물이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허문다니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워 저렇게까지 열성적으로 극성스럽게 기념사진을 찍는 것일까 싶었다. 돌아가 모두에게 자랑하고 길이 남기려 하겠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청화백자 분재화조준(盆栽花鳥文樽)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18세기말경 높이34.1cm
 
균형 잡힌 18세기 전반의 준에 비하면 직립한 입(구부)이 조금 높고 어깨는 넓어져서 전체적인 균형이 흐트러진 느낌이다. 문양은 종속문으로 구부에 당초 절지문이 있다. 어깨에는 여의두문과 동체하부 조금 위에 이중 횡대선을 긋고 여기 대에 밑으로 여의두문이 변형된 화판문이 있다. 그 밑에 간략화 된 칠보문이 있고 동체 제일 밑에 한줄 횡대선이 있다.
 
주모양은 받침 탁자위에 화분에 심은 꽃 핀 매화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그림과 역시 탁자위에 화분에 심은 꽃 핀 봉숭아나무에 새가 앉은 그림과 파초 그림과 탁자에 위 화분에 심은 국화그림 등을 대칭되는 몸체 양면에 각각 둘씩 그렸다. 화분에 심은 꽃나무 위에는 절지구름과 구름사이에 새가 날고 국화꽃에는 나비가 날아드는 등 전면이 화사한 문양으로 가득하다.
 
18세기 전반에는 유사한 기형에 대나무, 난옆 초화문, 파초문, 시문(詩文), 매화절지문 등이 간결하게 시문된 것에 비하면 백화난만한 화사한 그림으로 가득한 18세기말 19세기 초경의 청화백자의 특징을 아주 잘 들어낸 명품이라 하겠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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