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포도王, 봉사王으로 다시 태어나다

지난 1973년 121건의 절도사건을 해결하고 총 85명의 절도범을 검거해 ‘포도왕'에 오른 양기석 경감(당시 남대문경찰서 330수사대 소속)이 1계급 진급해 계급장을 수여받고 있다.(위)지난해 11월 '경우의 날'을 맞아 대통령표창을 수상한 양기석 서울 용산경찰서 경우회장이 맹형규 정무특보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주어진 시간은 40일. 그안에 도둑놈을 많이 잡으면 최고가 된다는 말에 양기석 형사(당시 서울 남대문 경찰서 330수사대 소속)의 눈이 번쩍 뜨였다. 법학도 출신 회사원에서 늦깎이 형사로 변신한 그는 어렵게 선택한 두 번째 인생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지존이 아니면 의미도 없다.’ 각오를 다진 양 형사는 당장 그날부터 매일 새벽 3시면 관할 내 주택가를 돌며 새벽 순찰을 돌았다. 동이 틀 때쯤이면 서울 황학동 중앙시장과 남대문 등 시장통을 돌며 장물아비들을 들쑤셨고 느지막이 사무실로 돌아와 수집한 첩보를 일지로 정리했다. 경찰서 안에 딸린 작은 쪽방에서 두, 세 시간 새우잠을 자고 나면 또 다시 새벽. 양 형사의 새로운 하루일과는 똑 같이 반복됐다.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모셔온’ 부인과 제법 말문이 트여 아빠를 찾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지만 굴비처럼 줄줄이 딸려오는 도둑놈들과 씨름하다보면 그리움도 만성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40일 뒤, 그는 총 121건의 절도 사건을 해결하고 모두 85명의 도둑을 붙잡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평균 3건의 사건을 해결하고 2명 이상의 범죄꾼에게 쇠고랑을 채운 셈이었다. 1973년, 경찰은 양 형사에게 ‘포도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총 34년 경찰 인생 가운데 가장 빛난 순간이었다고, 주름진 그의 눈에 다시 왕년의 영광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지난 1998년 은퇴한 양기석 경감은 3년 째 서울 용산경찰서 경우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80년 경위로 승진해 첫 반장직함을 달았던 감동을 못 잊어 용산에 터를 잡았다는 양 경감은 ‘신문에 실릴 만큼 대단한 일을 하진 못했다’며 쑥스러운 듯 기자를 맞았다.

그러나 내세울 게 없다던 양 경감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1972년 창설된 330수사대에서 가장 많은 검거실적을 올려 이듬해인 73년 ‘포도왕’에 등극한 그는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 사회면을 장식한 유명인사였다.

62년 서울 동묘파출소 말단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한 양 경감은 서울 남대문 경찰서와 강남 경찰서, 용산 경찰서 강력반장과 서울시경 형사과를 거쳐 강원 영월경찰서 수사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지난 98년 경찰청 수사보안 연수소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총 34년 경력 가운데 20년 이상을 ‘도둑 사냥꾼’으로 활약한 양기석 경감의 사건 파일엔 인간미 넘치는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넘쳤다.


시속 120km 질주하는 전동차 속 체포 작전

1973년 양 경감의 포도왕 등극 소식을 다룬 언론이 가장 주목한 것은 그가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전문 ‘넉재비’(치기배·소매치기) 일당을 경인선 전동차 안에서 격투 끝에 검거한 사건이었다.

당시 범인이 휘두른 면도칼에 양 손과 가슴 등을 깊숙이 베여 피투성이가 됐던 양 경감은 아직도 그때의 아찔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70년대 한창 못살던 시절엔 도둑도 많았습니다. 빈집에 몰래 들어가 생필품을 훔치는 좀도둑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5~6명씩 무리를 지어 행인들을 노리는 전문 소매치기 조직도 창궐하기 시작했지요.”

당시 서울역 주변과 유흥가를 중심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치기배들이 극성을 부렸었다. 이들은 범행을 눈치 챈 피해자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협박하거나 아예 단속 경관을 둘러싸 뭇매를 때리고 무기를 빼앗기까지 했다.

양 경감이 붙잡은 일당 역시 경인선 전동차를 타고 이동하며 승객들의 주머니를 노린 전문 치기배였다. 그들은 검거되기 전 서울 용산의 버스터미널 인근에서 단속 경관을 폭행하기도 했다.

“그때 만해도 장물들이 모이는 곳이 한정돼 있었습니다. 보통 시장통 안 상인들 사이에서 장물이 오갔지요. 대표적으로 서울 황학동 중앙시장과 동대문 시장이 유명하고 귀금속 종류는 남대문 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됐습니다.”

남대문 경찰서 330수사대 소속이었던 양 경감은 매일같이 시장통을 오가며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평소 상인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던 양 경감은 덕분에 일당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치기배들을 잡을 땐 무조건 현장을 덮쳐야 합니다. 녀석들이 전동차에서 범행을 저지른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호랑이 굴로 들어갈 차례였지요.”

서울철도청공안원실을 통해 수사협조를 얻은 양 경감은 그길로 동료 형사와 인천 출장을 계획했다. 이미 두목 장모(당시 23세)씨의 인상착의까지 머릿속에 새겨둔 양 경감은 일당의 활동 시간을 계산해 조용히 전동차에 올랐다.

“형사를 오래하면 사람 보는 눈이 생깁니다. 아무리 멀끔하게 차려입어도 범죄꾼과 선량한 시민은 단박에 구별할 수 있지요.”

눈을 번뜩이던 양 경감은 휴가 나온 군인을 에워싼 한 무리를 발견했다. 순식간에 군인의 손목시계를 낚아채는 순간을 똑똑히 목격한 그는 곧바로 동료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건장한 두 형사와 치기배 일당의 격투가 벌어졌다.

놈들이 시퍼렇게 날이 선 면도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바람에 양 경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됐다. 시속 120km를 육박하는 전동차 안에서 혹시라도 시민들이 다칠까 함부로 무기를 꺼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두목 정씨와 바람잡이 한 녀석을 포박했는데 나머지 놈들은 달리는 전동차에서 뛰어내려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씽씽 달리는 전동차에서 펄쩍 뛰어내린 범인들은 상처하나 없이 내빼더군요.”


“직장 상사 꼴 보기 싫어 경찰됐다”

흉기를 든 치기배들과 혈투를 벌이며 검거실적을 올린 양기석 경감. 하지만 경찰에 투신하기 전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직원 수 70여명 규모의 중소기업에서 사무직을 담당했던 그는 왜 경찰, 그것도 도둑 잡는 형사가 된걸까.

기자의 질문에 양 경감은 “사실 지금껏 아무한테도 못한 이야기인데…”라며 쑥스러운 고백을 털어놓았다.

“대학 졸업하고 친척 어르신 소개로 지방 모 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부자(父子)가 운영하는 회사였지요. 직원들은 사장 부자를 각각 ‘큰 사장님’ ‘작은 사장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입사한 지 1년 쯤 지나서 명절 떡값을 주는데 아무래도 그 과정이 수상한겁니다. 당시 재무 담당자가 ‘큰 사장님’의 직속 부하였는데 자기와 가까운 계열의 직원들에게만 눈에 띌 정도로 후한 떡값을 챙겨주더군요. 회사 내 계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 놓고 불만을 털어놨지요. 그랬더니 그 담당자가 직원들 수십 명이 있는 자리에서 절 엄청나게 면박을 준 겁니다. 참다 못 해 얼마 뒤 사표를 던지고 나왔지요. 그리고 이듬해 경찰 공채 시험을 봤습니다. 솔직히 말해 경찰이 돼서 그때 날 면박 준 상사 앞에 보란 듯 등장하고 싶었거든요. 젊은 시절 철없는 생각이었지요.”

이런 사연은 가족들도 모른다며 껄껄 웃은 양 경감은 “차마 ‘포도왕’까지 한 형사가 직장 상사한테 복수하려고 경찰됐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며 뒤늦게 토로했다.

경찰이 되고난 뒤에도 웃지 못 할 수난사가 이어졌다. 62년 공채에 합격해 63년 5월 서울 동묘파출소 순경으로 발령을 받은 임 경감. 뽀얀 솜털이 고스란히 남은 병아리 순경은 제복 차림으로 동네 순찰을 도는 임무를 맡았다.

“입사한지 두 달 쯤 됐나 제 인생 처음으로 도둑을 잡게 됐는데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인근 유흥가 순찰을 도는 중이었는데 어떤 녀석이 라디오를 품에 안고 걸어오다 절 보더니 냅다 달아나는 겁니다. 죽어라 쫓아가 덮쳤는데 이 녀석이 반항도 안하고 곧장 무릎을 꿇더니 ‘잘못했다. 살려달라’ 매달리더군요.”

양 경감은 좀도둑에게 수갑을 채워 의기양양하게 파출소로 향했다. 순찰차도 없던 시절이라 백주대낮 대로를 순경과 도둑이 일렬로 걸어가는 식이었다. 이실직고까지 한 범인이 도망가겠나 싶어 양 경감은 범인에게 ‘따라오라’고 이르고 유일한 무기인 방범봉을 휘휘 돌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첫 검거실적을 칭찬해줄 소장님과 선배들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런데 일이 쉽게 될 리가 있습니까. 저도 참 바보지요. 범인을 묶어서 직접 끌고 가든지, 아님 앞장세우든지 해야 했는데. 당연히 녀석이 줄행랑을 쳐버렸지요.”

결국 관내 파출소 인원이 총동원된 끝에 5시간 만에 하수구 안에 숨은 범인이 붙잡혔다. 도망친 용의자가 붙잡힌 순간, 당시 파출소장은 양 경감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벌로 보름 동안 새벽 보초를 섰지요. 첫 검거 과정은 어설프기 그지없었지만 이후 남대문 경찰서로 자리를 옮겨 도범계에 발을 담갔습니다. 날 때부터 도둑이 없듯이, 날 때부터 형사도 없는 셈입니다.”


가난 찌든 소년범에 눈물… 은퇴 뒤 청소년 봉사 매진

양기석 경감은 은퇴 경관 가운데서도 상당한 활동력을 자랑한다. 용산경찰서 경우회장으로 취임한 뒤 지난해 11월 21일 ‘경우의 날’을 맞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국 272개 경찰서 경우회 가운데 용산서 경우회가 ‘챔피언’이 된 셈이다. 이 표창은 전국 경우회 중에서도 지역 봉사와 치안활동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곳에 수여된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 양 경감이 특히 공을 들이는 것은 바로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이다. 지난 2004년 사단법인 한국 B.B.S(Big Brothers&Sisters Movement·총재 이흥재) 중앙연맹 부총재로 취임한 양 경감은 매달 소년소녀 가장의 장학금을 대며 후원하고 있다. B.B.S는 불우 청소년과 지역 성인들이 1대1 결연을 맺어 친부모, 형제처럼 그들을 이끌어주는 활동을 펼치는 단체다.

1904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B.B.S 운동은 지난 1964년 4월 전국 11개 시·도 독립법인이 마련돼 현재 14개 시·도 연맹(시·군·구 지회 171개, 읍·면·동 분회 93개)으로 조직돼 있다.

“예전에 서울 서부이촌동, 용문동 인근의 빈민가 사건사고를 추적하며 가난에 찌든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많이 봤습니다. 특히 어린 소년범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도둑으로 전락하는 딱한 사정에 눈물도 많이 흘렸지요. 그땐 직업이 형사라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범죄자로 잡아들이며 ‘포도왕’이 됐지만 이젠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봉사왕’이 되고 싶습니다.”


리얼스토리 talk box 양기석 경감

330 수사대 명칭, 형법 330조에서 딴 것

양기석 경감은 72년 발족된 ‘330 수사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당시 330 수사대의 설립 배경과 본문에서 담지 못한 양 경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마저 들어봤다.

- 72년 서울시경 이하 시내 경찰서 20여 곳에 ‘330수사대’가 설치됐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
▲ “330수사대는 72년 검사 출신의 이건개씨가 서울시경국장으로 임명된 뒤 그의 취임 일성에 따라 설치됐다. 이건개씨의 부친 이용문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육사 7기 선배로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다. 당시 경찰 조직의 엘리트화를 지향했던 박 대통령은 선배의 아들이 검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시경국장에 임명하는 파격 인선을 단행했다. 29살의 나이로 서울시경수장이 된 이건개 국장은 ‘서울시민 여러분 모두 밤에 창문을 활짝 열고 주무시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들끓던 좀도둑을 소탕하겠다는 각오였다. 이건개 국장의 일성에 따라 서울시경과 서울시내 각 경찰관서에 절도사범 전담 특수대인 ‘330수사대’가 조직됐다. 330수사대의 명칭은 형법 330조, 주거침입절도죄에 대한 법령에서 따온 것이다. 시경이 주도적으로 운영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각 경찰관서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들만 모인 엘리트 수사팀으로 유명했다.”

- 엄청난 검거실적으로 ‘포도왕’에 올랐는데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나.
▲ “나는 정보원을 포섭하고 관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오래 잠복근무를 하며 의심스러운 인물을 걸러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한마디로 범죄꾼의 관상을 봤다는 얘기다. 나와 수사조를 이룬 동료는 이런 관상보기로 자주 밥내기를 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마주친 행인의 얼굴과 차림새만 보고 그가 회사원 또는 장사꾼인지를 맞추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불심검문 대상을 고르면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 법대 출신 엘리트 회사원에서 민완 형사가 됐다. 후회한 적은 없는지.
▲ “후회한 적은 없고 지금 부인과 결혼할 때 처가 반대가 심해 마음고생을 좀 했다. 아는 어르신 소개로 지금 아내를 만나 연애를 했는데 막상 내 직업이 형사라는 걸 아신 장인어른이 심하게 반대하셨다. 박봉일 뿐 아니라 과거 일제시대 ‘순사’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를 포기하기에는 사랑이 너무 깊었다. ‘순사한테는 내 딸 못준다’며 버티시는 처가 어른들께 ‘내가 따님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증명하겠다’고 선언하고 아내를 그야말로 ‘모셔왔다’. 뭐 결혼 뒤에는 도둑놈 잡느라 몇 달씩 집에도 못 들어갔지만. 한동안 아내는 ‘속았다’며 무척 억울해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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