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모녀 살해사건’ 담당형사 드디어 입 열었다


2003년 2월,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공방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아내와 한 살배기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혐의의 30대 외과의사가 대법원에서 ‘무죄’라는 면죄부를 손에 쥔 것이다. 무려 8년여에 걸친 지루한 싸움이 끝나자 환희와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특히 일가족을 잃고 ‘억울한 옥고’까지 치른 피고인에 대한 동정어린 관심이 집중됐다. 두 생명이 잔혹하게 목숨을 빼앗겼음에도 살인범은 없는, 최악의 결론 속에 사건은 종결됐다. “언론은 물론 주위 사람들 모두 우리를 비난했습니다.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며 무능하다고 손가락질을 했지요. 견디다 못한 후배 형사 한 명은 아예 사표를 던지고 경찰을 떠났습니다.”

당시 서울 은평 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일선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윤건영 경감의 눈에 한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자신은 물론 후배 형사들에게 쏟아진 여론의 뭇매가 부담스러워 윤 경감은 당시 사건 파일을 가슴 깊숙이 묻어버렸다고 했다. 그가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여러 번 고사한 것도 혹시나 남은 이들에게 누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설득 끝에 마침내 윤 경감이 입을 열었다. 그가 처음 털어놓은 증거들이 지목한 진범은 누굴까.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명백한 범행동기가 일 그르쳤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95년 6월 12일 서울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 불이 났다. 안방에서 시작된 불길은 방 천정 등을 태우고 진화작업 7분여 만에 꺼졌다. 그런데 불이 난 집 욕실에서 집주인 C 여인(당시 30세·치과의사)과 어린 딸(당시 1세)이 욕조에 잠긴 채 시신으로 발견됐고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수사팀은 가정불화 끝에 남편 이모(당시 32세·외과의사)씨가 일가족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결국 경찰과 검찰은 이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구속기소 했고 그의 유·무죄를 가리기 위한 법정공방이 무려 8년 간 치열하게 진행됐다.

사형을 선고한 1심과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첫 번째 대법원 판결을 제외하고 이씨는 나머지 3번의 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것은 지난 2003년 2월. ‘한국판 OJ심슨 사건’으로 불리며 세간의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치과의사모녀 살해 사건은 진범 없는 미제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무려 14년이나 흘렀지만 윤건영 경감은 당시 사건발생 일시와 관련자 이름 등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했다. 30년 경찰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희대의 미스터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을)처음부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유일한 실수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인사건을 쫓으면서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 바로 동기입니다. 형사들 사이에선 속된 말로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치정이나 원한, 금전관계 등 누구나 수긍할 만한 살해동기가 존재한다는 얘깁니다. 죽은 C 여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병원 진료실서도 내연남과…

언론에 알려진 바와 같이 숨진 C 여인에게는 내연남이 있었다. 명문대 출신 치과의사였던 C 여인은 89년 이씨와 결혼한 뒤 지난 92년 서울 연신내에 개인병원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인테리어 업자 J 씨와 C 여인은 사건 직전까지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했다. 이 사이 남편 이씨는 강릉에서 공중보건의로 군복무 중이었다.

당시 C 여인의 불륜 행각은 크게 조명되지 못했다. 망자에 대한 일말의 예의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의 비행은 사회적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고 윤 경감은 토로했다. 그만큼 C 여인이 ‘잘못된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다는 얘기다.

윤 경감에 따르면 C 여인은 내연남과 자신의 병원 진료실 안에서까지 진한 밀회를 즐겼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직접 C 여인의 병원에서 근무한 간호사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당시 3명의 간호사가 병원에 근무했는데 그네들 말이 한결 같았습니다. ‘우리가 파출부냐’며 죽은 여의사를 탓하더군요. 병원 집무실에서 내연남과 애정행각을 벌이고는 뒷정리를 간호사들에게 시켰다는 겁니다.”

C 여인의 충격적인 사생활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일기장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특히 ‘남편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당신을 생각했다’는 연서에 윤 경감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 같은 사실을 남편이 알았다면, 피해자를 살해할 동기는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경찰에서 아내의 외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한 달여 전 C 여인이 가벼운 병치레로 입원했을 때 J 씨가 문병을 와 남편 이씨와 대면했지만 그때도 이씨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씨는 오히려 경찰이 억지 정황을 끼워 맞추려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수사팀의 가설을 뒷받침할,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더 필요했다.


‘위험한 독신녀’의 비밀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기억해야 할 것은 불을 끄기 위해 먼저 진입한 소방관들에 의해 현장 증거가 상당부분 훼손됐다는 점이다. 윤 경감은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 한 장’이 수사팀의 심증을 굳히는 핵심적인 증거물이 됐다고 회상했다.

“집에서 발견된 이씨의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서 수상한 쪽지가 나왔습니다. 소설 제목 같은 리스트를 손으로 적은 것이었지요.”

확인결과 문제의 리스트는 소설 제목이 아닌 영화제목으로 드러났다. 92년 개봉한 ‘위험한 독신녀’ 등 모두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었다. 윤 경감은 과거에 모 대학교수가 부친을 살해하고 ‘소설책에서 살해수법을 배웠다’며 진술한 것을 떠올렸다.

윤 경감은 곧바로 목록에 있는 영화를 모두 구했다. 비디오를 본 직후, 윤 경감은 물론 수사팀 형사 모두가 등골이 오싹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영화 속 살해수법이 마치 현실에 재연된 것 같았습니다. 극중 여자 범인이 남성을 죽여 욕조에 시신을 담그는 장면이 등장하는 게 아닙니까. 온몸에 소름이 끼치더군요.”

윤 경감은 이씨에게 문제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정물었다. 하지만 이씨는 ‘제목조차 기억이 안 난다’며 부정했다. 윤 경감은 곧장 이씨가 공중보건의로 근무했던 강릉에 수사팀을 급파했다. 이씨가 문제의 비디오를 봤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숙소 인근 비디오가게에서 그가 같은 영화를 두 번이나 대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확히 이씨는 94년 2월 28에 해당 비디오를 빌려 3월 2일 반납했다. 그는 또 같은 해 10월 26일 또 다른 대여점에서 이를 빌려 보름 넘게 소장하다 뒤늦게 돌려준 일이 있었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이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완전범죄 도운 ‘증거제일주의’?

형사들이 수집할 수 있는 온갖 정황증거가 총망라됐지만 오히려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씨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 ‘확증’(흉기, 체액 등 신체흔적, 목격자 등)이 없었고 제3자가 범인이라는 단서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사건은 이씨의 유·무죄를 가리는 진실공방으로 번졌다.

“수사팀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당시 고려대 의과대학 황적준 교수와 서울대 의과대학 이정빈 교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권일훈 박사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법의학자들을 총동원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수사했지요.”

과거 ‘박정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힌 황적준 교수를 필두로 한 법의학자 3인방이 수개월에 걸쳐 사건을 파헤쳤지만 결론은 허무했다. 이씨가 범인이라는 확증도 없지만 제3자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도 분명치 않다는 것. 그것이 수천만원의 돈과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총동원된 가운데 얻은 유일한 결과였다.

“이씨가 무죄판결을 받은 고등법원 재판 이후 일선 형사들은 모두 사건에서 손을 뗐습니다. 입에 피거품이 낄 정도로 발로 뛰어 모았던 모든 증거들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때 기분 아십니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 그 허무함을…”

1996년 이씨에 대한 2심 판결이 나온 이듬해 수사팀에 몸담았던 후배 형사 한 명이 윤 경감에게 사표를 내밀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개인 사정이었지만 사건과 관련된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때 떠난 후배에겐 면목이 없었습니다. 진범이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형사들에게는 자괴감이니 말입니다.”

물론 법원의 판단대로 이씨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 사실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14년 전 벌어진 사건의 진범을 잡을 길이 요원해졌다는 것이다. 젖먹이 아기까지 목 졸라 살해한 파렴치범은 과연 누굴까. 윤 경감은 인터뷰 말미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기자에게 던졌다.

“누가 범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형법상의 무죄가 양심의 무죄가 될 수는 없겠지요. 끔찍한 짓을 저지른 진범이 어느 곳에서든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길 바랍니다.”



#“민감한 사건, 특정인에 피해 없도록”

“이씨, 달변가 아니지만 차분한 인물”

윤건영 경감
1969년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72년 충북단양경찰서 순경으로 입문한 윤건영 경감은 치안본부(현 경찰청) 내 전산 전문가로 유명세를 떨쳤었다. 비상한 기억력과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80년 형사과로 자리를 옮긴 윤 경감은 서울시경 감식계장, 은평 경찰서. 서부 경찰서 형사계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은평서 형사계장 시절 직접 담당했던 치과의사모녀 살해사건은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가장 민감한 강력 사건으로 꼽힌다. 유력한 용의자와 범행을 입증할 수많은 정황증거가 있었음에도 ‘확증’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방면 된 드문 사례인 까닭이다. 윤 경감은 기자와의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특정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기사 수위를 조절해줄 것을 당부했다. 법원의 판단처럼 특정인이 범인이라는 증거도,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씨가 사건의 범인이라고 확신하나.
▶내가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경찰이 수집한 정황증거를 종합할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이씨였기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 이씨는 ‘제3의 침입자가 있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경찰이 처음부터 특정인을 용의자로 몰아 증거와 정황을 짜깁기했다는 비난도 컸는데.
▶그런 비판을 받을 때가 가장 억울한 순간이었다. 분명한 건 형사들은 원칙대로 수사했고 그에 상응하는 증거물을 다수 확보했다는 점이다. 초동수사가 완전히 잘못됐었다면 법원에서 이 사건을 8년이나 질질 끌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제3의 침입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한 적도 없다. 다만 피해자 집에 불이 났을 당시 문이 안으로 잠겨있었다는 점과 목격자가 될 수 없는 한 살배기 젖먹이까지 살해한 것, 더운물로 채운 욕조에 시신을 담가 사망추정 시각을 은폐하려 한 것 등으로 미뤄 단순 침입자에 의한 강도 살인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결론을 나왔다. 결국 피해자와 깊은 원한이 있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가장 컸고 피해자 주변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부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심문을 직접 담당했다. 당시 이씨의 태도는 어땠나.
▶첫인상은 굉장히 가냘프다는 것 정도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모두 부인하거나 모른다고 대답했다. 비디오테이프 대여 기록 등 확인된 증거물을 들고 흔들어도 ‘기억이 안 난다’며 버티는 식이었다. 언변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차분했다. 가끔 심문 과정에서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기도 했지만 자백을 하거나 진술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