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生보다 死 더 익숙한 남자들… 대한민국 원조 CSI 떴다

이계병 감식관(사진왼쪽) 이날 만남을 주선한 최중락 삼성에스원 고문(사진 중앙) 김만범 경감(사진오른쪽) (맨위) 김만범 경감이 사건 현장에서 시신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가운데)삼풍백화점 붕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사건 기사.

눈앞에 총천연색으로 펼쳐진 사건현장은 선명한 핏빛과 부패한 시신의 누런 살점이 뒤섞여 있었다. 줄잡아 50여장은 됨직한 사진 속에는 80~90년대 서울 시내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엽기적인 살인사건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현장은 수사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1년이면 200회 이상 출동해 현장에 남겨진 범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오는 게 우리 일이지요.”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끔찍한 현장 사진을 한 장, 한 장 기자에게 내보이는 노(老)수사관의 음성은 차분했다. ‘예쁘게’ 다듬어진 미드(미국 TV 드라마) 속 사건현장과 실제는 극명하게 달랐다. 퉁퉁 부풀어 오른 피해자의 얼굴은 부패해 일그러져 있었고 토막 난 시신의 절단면은 누런 지방과 장기가 곤죽처럼 뒤섞여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광경. 이는 모두 서울시경 재직 시절 김만범 당시 감식계장(경감)과 이계병 감식관이 현장에서 채집한 증거물 가운데 극히 일부였다. 1970년 ‘정인숙 사건’부터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까지 대한민국 사건·사고의 산증인들이 모였다. 이 두사람이 리얼스토리의 22번째 주인공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한여름 뜨거운 지열에 불길을 잡기 위해 물 폭탄까지 쏟아 부으면서 시신들이 온통 곤죽처럼 녹아버린 상태였지요.”


삼풍 사고 희생자 50명 ‘무명’으로 갔다

감식반 경력만 27년차인 김만범 경감은 3000여 구의 시신을 검안한 베테랑 감식관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인명사고로 기록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이었던 그는 500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신원확인과 현장감식을 진두지휘한 총책임자로 나섰다.

14년 전 참혹한 현장을 회상하던 김 경감은 괴로운 듯 미간을 좁혔다. 사망 501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사상최악의 사고현장에서 그는 남다른 각오를 불태웠다고 했다.

“그때 시경 감식반을 풀가동해도 모자라 일선 경찰서에 요청해 베테랑 멤버 20여명을 추가로 차출했지요. 일종의 감식 ‘드림팀’이 만들어진 셈인데 그 친구들에게 딱 한마디 부탁만 했습니다. ‘절대 불평하지 말고 일에만 집중해 달라’였지요. 수백 명이 돌 더미 아래 깔려 있는데 내 부인, 내 자식, 내 친구가 이런 꼴을 당했다 여기라고 말입니다. 절망에 잠긴 유족들에게 온전한 시신이라도 돌려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경감과 감식반원들은 희생자들을 가족 품에 돌려주기 위해 꼬박 한 달 동안 철야를 감행했다. 다행히 300여 명은 지문조회 만으로 연고자를 찾을 수 있었고 불에 타거나 습기에 뭉개져 지문 확보가 불가능한 시신 100여구는 DNA 감정을 거쳐 영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100여명이었습니다. 날이 더운데다 건물 잔해에 완전히 짓이겨져 형체조차 안 남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나마 두개골과 치열이 온전한 이들은 슈퍼임포즈법(두개골 형체를 복원해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을 쓸 수 있었지만 완전히 분쇄된 유해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남은 50여명은 무명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김 경감은 희생자 50명을 떠나보내며 회한의 눈물을 삼켰다고 했다. 결국 실종자 명단에는 있지만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유해들을 50명 몫으로 나눠 합동 장례를 치렀다.

“처음엔 신원확인 100% 성공률을 목표로 모였는데 막상 기대에 못 미치자 허탈함이 컸습니다. 한 달 동안 무너진 백화점 터에서 뜬 눈으로 지샌 후배들을 볼 면목도 없었고 말입니다.”


‘정인숙 사건’ 현장감식 비화

김 경감의 직속 후배인 이계병 감식관 역시 회상에 잠겨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망자가 500명에 달하는 대형 참사는 아니었지만 이 감식관도 젊은 시절 굵직한 사건 탓에 마음고생을 했던 때가 있었다. 1970년 3월 벌어진 ‘정인숙 피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정 여인은 ‘희대의 요부’로 불렸다. 외국인과 유명인사만 상대하는 고급 호스티스였던 정 여인. 그가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피살된 뒤 관계를 맺은 유력 정치인 26명의 리스트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사건은 대형 정치 스캔들로 비화됐었다.

정일권 당시 총리와 대통령까지 연루됐다는 의혹과 함께 정 여인 사건은 현재까지도 진범과 배후 여부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계범 감식관은 ‘정인숙 사건’이 벌어진 현장과 정 여인의 시신을 최초로 감식한 수사관이다. 당연히 당시 현장과 수사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계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통행금지 제도가 엄격했던 1970년 3월, 여느 때처럼 사건 접수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지요. 검은색 코로나 승용차 뒷좌석에 상당한 미인이 가슴과 배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더군요. 그 땐 사건이 이렇게나 커질 줄 몰랐습니다.”

이 감식관은 사건과 관련해 최대한 말을 아꼈다. 단지 경찰 안팎에서 사건이 외부로 세어나가지 않도록 철통같은 보안이 유지됐고, 현장감식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뤄졌다는 것 정도만 확인해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정 여인에게 남편을 빼앗긴 귀부인들이 경찰에 몰려와 한 바탕 난리굿을 했다더군요.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정 여인을 죽인 진범이 그의 친오빠라는 사실입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문 킬러가 고용됐다는 둥, 정 여인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이 정일권 총리의 핏줄이라는 둥의 주장은 언론이 만들어낸 뜬소문이라는 겁니다.”

두 감식관의 손을 거친 사건들이 백사장 모래알처럼 많은지라 노 수사관들은 일일이 사건개요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몇 건의 현장 사진과 자료들을 기자에게 보였다.

팔, 다리가 뭉텅뭉텅 잘려나간 이, 불에 반쯤 타 형체만 남은 피해자도 있었다. 강간당한 뒤 살해된 한 여성은 성기에 날달걀이 박힌 채 발견됐고, 내연녀에게 살해된 30대 남성은 생식기가 뿌리까지 잘려나가 있었다. 웬만한 담력으로는 보기조차 힘들 만큼 참혹한 사건들 일색에 자연히 인상이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보기에 끔찍하지만 하나 같이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시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면 절대 이 바닥에서 못 버팁니다. 우리 때만 해도 감식반은 경찰에서 최악의 근무처로 꼽혔습니다. 마누라조차 ‘재수 없으니 제발 다른 보직으로 옮기라’며 애원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재수없다’ 가족들도 말린 직업

기자에게서 점잖게 사진을 거둬간 김 경감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가족들조차 끔찍해 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긴 이들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나는 게 우리 감식반원입니다. 매일, 적어도 하루걸러 한 번씩 사건 현장에 나갔다 오면 구더기를 안 묻혀 들어오는 날이 없지요. 우리 부인은 내가 돌아오면 늘 소금 한 바가지씩을 집 현관이며 곳곳에 뿌려대곤 했습니다. 재수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나한테는 이 일이 천직이었습니다. 아마 모든 감식반원들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계병 감식관 역시 과거의 아픈 사연을 털어놓았다. 36년 전 감식반 신참요원 시절, 이 감식관의 막내가 태어나던 날 벌어진 일이다.

“만삭인 안사람이 병원 검진 한 번 제대로 못 받을 정도로 집안 사정이 어려웠습니다. 야간 근무를 하고 퇴근을 했는데 갑자기 산통이 왔지요. 어쩔 수 없이 제가 직접 아이를 받고 탯줄을 잘랐습니다. 고생한 아내에게 ‘수고했다’ 말 한 마디 못할 정도로 서글펐지요.”

막 아기를 산모 옆에 누이고 한 숨 돌리려던 찰나, 본부의 호출이 떨어졌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 만큼은 곁에 있어달라는 아내와 핏덩이 아이가 눈에 밟혔지만 도리가 없었다. 사건현장에 감식반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아내를 달래고 집을 나선 그.

“서울 관악산 인근 암자에서 스님이 돌아가신 사건이었지요. 한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습니다. 부패한 목과 팔, 다리, 몸통이 낭떠러지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더군요.”


가난보다 더 서글픈 애환

새 생명을 맞이한 날 또 다시 끔찍한 사건 현장에 던져진 이 감식관의 마음은 무거웠다. 갓 아이를 낳은 부모가 송장을 보면 자식에게 액운이 낀다는 미신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돌봐줄 친척도 없어 이웃 아주머니에게 부인과 아이를 맡긴 자신이 못나도 그렇게 못나 보일 수 없었다.

“그래도 내 일인 걸 어쩝니까. 관악산 인근을 뒤져 나뒹구는 시신 조각을 직접 손으로 주워 형태를 맞추고 나머지 증거까지 모두 챙겨 본부에 넘겼지요.”

꺼림칙한 기분으로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 감식관은 새근새근 잠 든 막내의 얼굴을 보며 죄스러운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뜻밖의 불청객이 그를 괴롭혔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구더기였다.

“바짓단에 묻어온 구더기가 애기 얼굴 바로 옆에 떨어져 꿈틀대는 게 아닙니까. 늘 있는 일이지만 그 날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할 만큼 괴로웠습니다.”

산고에 지친 아내 몰래 이 감식관은 얼른 구더기를 휴지에 싸 방을 빠져나왔다. 최대한 먼 곳에 이를 내다 버린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입고 있던 옷가지를 모두 벗어 빨고 한 맺힌 사람처럼 목욕을 했다.

“그땐 ‘나 때문에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호강은 못 시켜주더라도 걸림돌은 되지 말아야 하잖습니까.”

이 감식관은 지금도 이 사건을 부인에게 비밀로 부쳤다고 했다. 차마 미안해서, 죄책감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는 그는 20년 경력을 채우자마자 경찰을 떠났다.

“우린 돈이나 출세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일반 수사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주연’이라면 감식반은 이들을 돕는 ‘조연’이지요. 고되고 돈 못 버는 직업이지만 한 가지 위안은 있습니다. 적어도 죽은 사람은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산 사람이 망자보다 무서운 세상이니 말입니다.”

生보다 死가 더 익숙한 사람들. 김만범 경감의 말 속엔 뼈가 있었다.



#리얼스토리 talk box 김만범 경감·이계병 감식관

멋모르고 차출 당한 감식반, 천직되기까지
토막시신 감싼 신문지로 범인 잡은 사연

충격과 공포. 두 감식관이 기자에게 보인 사건현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두 단어가 제격이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현장들은 두 감식관의 손을 거친 사건 가운데 빙산의 일각이라고 했다. 죽은 시신의 음부까지 파헤쳐야 하는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부서에서 수십 년을 버틴 끝에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섭다는 두 사람.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타고난 감식반원이었던 건 아니었다.

- 현장감식은 상당한 전문 지식을 요하는 분야다. 당시 감식관 선발 과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 이계병 감식관(이하 이)- “과거에는 특별한 선발과정 없이 인원을 일괄 차출했다. 일단 감식반에 배치되면 2년 간 현장실습과 전문교육을 받는다. 지문감식과 감정, 현장사진 촬영법, 사체감식 등을 배우고 매 분기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요원이 된다. 대졸 출신 특채로 입문했을 당시엔 내가 감식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김만범 경감(이하 김)- “난 감식반에 자원한 케이스다. 수원경찰서 순경으로 입문해 일선서에서 노점 단속만 주구장창 하다보니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에 신물이 났던 탓이다. 이후 감식반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고되긴 해도 내 적성을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경찰대 강의도 하고 서울시경 과학수사계장에 훈장(옥조근정훈장)까지 받았으니 성공하지 않았는가.”

- 감식반에도 각자 역할 분담이 있다고 하던데.
▲ 이- “지문감식이 내 전문이다. 현장에서 지문을 떠 피해자와 용의자로 나눠 분류하고 이를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지금은 전산으로 정리돼 있지만 과거 문서철로 구분돼 있을 땐 고생을 상당히 많이 했다.”
▲ 김- “굳이 전문분야를 따지자면 시신 염습이랄까.(웃음) 모든 감식반원이 마찬가지지만 죽은 사람을 다루는 사체감식을 주로 많이 했다. 보통 감식반 한 조에 5~6명의 인원이 있는데 이들이 각각 지문채취와 사진촬영, 시신검안 등 역할을 나눠 작업한다.”

- 감식반이 건진 현장증거로 해결된 사건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 김- “89년 10월 서울 봉천동 야산에서 30대 여성의 토막 시체가 발견됐다. 현장에 가보니 시신은 신문지로 싸여 은폐돼 있었는데 확인해보니 A일보였다. 또 신문 기사 가운데 특정 정치인의 이름에만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닌가. 결국 관할 지역 내 A일보 구독자를 모두 추리고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지역 출신 인사로 수사망을 좁혀 범인을 잡아냈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사진=맹철영 기자] phot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