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OECD국 중 4위
오랜 불황으로 ‘평등사회’ 속절없이 무너져


[일요서울 | 송철복 수석 편집위원] 세계3위 경제대국 일본에서 빈곤층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오랜 자부심이었던 ‘평등 사회’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지난해 4월 일본 정부는 소비세(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를 5%에서 8%로 인상했다. 갈수록 불어나는 재정적자를 감당할 길이 없자 세수를 늘리려 택한 고육책이었다. 국제적으로 공공부채 규모는 해당 국가의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하여 표시하는데, 일본의 GDP 대비 공공부채는 250%가 넘는다(한국은 62.9%). 일본은 미국, 중국에 이은 경제대국이면서 동시에 부채대국이다(그렇지만 해외자산이 많아 순(純)채무국은 아니다).

세수를 늘리려면 소득세나 법인세를 올리는 것이 효과적인데 그러자면 조세저항이 우려된다. 그래서 손쉽게 택한 것이 간접세인 소비세 인상이었다.

직접세인 소득세의 경우 많이 버는 사람이 적게 버는 사람보다 더 높은 세율로 세금을 낸다. 이른 바 누진제(累進制)다. 한 달에 100만 원 버는 사람이 소득세로 5만 원을 낸다면, 한 달에 1000만 원 버는 사람은 세금으로 그 10배인 50만 원이 아니라 예컨대 70만원이나 80만 원을 낸다. 그래야 ‘부자가 세금을 더 내어 빈자를 돕는’ 교과서적인 조세정의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간접세는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은 세율을 적용한다. 따라서 간접세가 올라가면 부자보다 빈자가 더 많이 고통을 느낀다(우리나라 담뱃값이 일제히 2000원 오르는 바람에 특히 저소득 애연가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베 정부가 소비세를 더 걷어 재정적자를 메워 보려고 했던 구상은 자연히 차질을 빚게 되었다. 소비세가 오르니 일본 소비자들이 소비를 더 줄이는 바람에 증세 효과가 미미해지고 만 것이다.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지난 2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소비세율 인상 이후) 계속해서 지출을 줄이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가 전체의 75.3%였다. 지출을 줄인 이유로는 ‘가격이 올라서’가 82.1%로 가장 많았고 ‘수입이 줄어서’라는 응답이 36.4%였다. 수입이 줄어들었다는 응답이 40%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일본 근로자들의 소득상황을 웅변한다.

소비세 인상 1주년을 맞아 일본 빈곤층의 힘겨운 생활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소득 양극화가 심한 데다, 재정압박으로 인해 국가가 빈곤층에 대한 복지지원을 충분히 할 수 없어 저소득층의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소개한 ‘고토부키’ 동네의 모습은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일본 빈곤층의 힘겨운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토부키’는 한자 ‘수(壽)’를 일본어로 읽은 것으로 ‘장수, 축하’라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특급호텔 등에서 일식당 간판으로 즐겨 쓰고 있기도 하다.

<이코노미스트>가 찾아간 고토부키 동(洞)은 도쿄와 맞닿은 대도시 요코하마 한복판에 위치하는데, 주변의 번화가와 대조적으로 지저분한 동네다. 여기에 지난 10년 사이 들어선 싸구려 여인숙 건물이 40채 밀집해 있다. 이들 건물에 모두 1만8000명의 육체노동자가 세들어 살고 있다. 세입자들 중에는 일감이 끊어지는 바람에 방을 빼주고 노숙자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해 기준 일본의 빈곤율(중위소득의 절반에 못 미치는 인구의 비율)은 사상최고인 16%다(한국은 15.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18.5%), 터키(17.5%), 미국(17%)에 이어 4위다.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최근 일본경제가 다소 회복되고 있음에도 한계상황으로 내몰리는 일본인의 수는 늘고 있다. 정부로부터 생계비 지원을 받는 생활보호대상자(한국의 ‘기초생활보장수급자’에 해당)는 1995년 88만2000명으로 바닥을 찍은 뒤 줄기차게 늘어나 지난해 처음 200만 명을 돌파했다(한국은 2015년 6월 기준 134만 명). 2014년 8월 기준 216만 3152명인 일본의 생활보호대상자는 노인(45.5%), 환자 및 장애인(29.3%), 미혼모(7.1%)가 주종이다.

일본은 OECD 국가 중에서 근로가계와 유(有)자녀 가계의 빈곤율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있음에도 이들 계층에서 빈곤율이 높아가는 것은 벌이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다. 아베 총리가 취임한 2012년 12월 이래 정규직 임금의 절반도 못 받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150만 명 늘었다. 대부분 임시직이거나 시간제인 비정규직 근로자는 2000만 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40%다(한국은 33.4%).

이처럼 근로빈곤층이 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정부의 복지예산은 노인들을 돌보는 데 집중되고 있어 근로 빈
곤층에게까지 돌아갈 몫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일본 국민들 사이에 ‘빈곤’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레 자리잡아 가고 있다. 최근에는 빈곤층을 겨냥한 ‘빈곤 사업’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빈곤 사업’은 보증금 없는 소형 아파트 임대, 하룻밤 숙소용 인터넷카페 운영을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 사업을 가리킨다.

언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사회 변화상을 탐사보도하기로 유명한 일본 주간지 <SPA!>는 지난해부터 빈곤을 정식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잡지가 지난해 11월 보도한 ‘신종 빈곤의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죄악’은 △기업의 비정규직 채용 확대 △소득이 대폭 줄어드는 직업 변경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악덕기업의 확산 △불황사례 증가 △노부모 봉양 부담 △주택할부금과 자녀교육비 지출에 따른 부채 압박 △중년에 이르도록 결혼할 전망이 없는 사람들의 증가다.

이처럼 일본인들 사이에 빈곤이 확산됨에 따라 사회 전반에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2010년 일본 내각 관방성은 일본에 히키코모리(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가 70만 명 있다고 발표했다. 히키코모리는 숨어 사는 사람들이어서 사회문제로 부각되지 않지만, 이들의 부모가 별세하고 나면 이들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이다.

은둔자인 히키코모리 말고도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저임금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들의 빈곤 문제 또한 표면화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젊은이들이 집세를 안 내도 되는 부모 집에서 동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학자들은 이런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가 타계한 이후 빈곤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걱정한다.
scottnearing@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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