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나를 역적으로 몰았다”

photo@dailysun.co.kr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지난 1월 이 한 마디에 인터넷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유신정권 시절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해 일명 ‘고문 대부’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 전 경감이 오랜 침묵을 깨고 내뱉은 말인 까닭이다. 무려 10년 11개월에 걸친 도피생활 끝에 1999년 전격 자수, 2006년 11월 7년의 수감생활을 끝으로 만기 출소한 그는 지난 2008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거듭난 뒤에도 외부노출을 극도로 자제하며 말을 아껴왔다. 철저히 ‘잊혀진 인물’이었던 이근안 전 경감은 지난 1월 돌연 한 극우성향의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후 한 달여 만인 지난 4일 [일요서울]은 서울 모처에서 이근안 전 경감을 다시 만났다. 해당 매체와 인터뷰 직후 모든 언론 접촉을 일체 거절했던 그는 당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또 다시 ‘투쟁’의 대상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기자와의 만남 도중 수시로 당뇨 치료제와 혈압약을 챙겨먹는 그에게서 ‘잔혹한 고문기술자’의 흔적을 찾는 것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오랜 설득 끝에 본지와의 만남을 허락한 이근안 전 경감은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냈다. 여기엔 자살설, 해외밀항설, 성형수술설, 비호은둔설 등 온갖 설(說)들이 난무했던 10여 년 간의 도피 그후 과정과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당시 고문 피해자들과 얽힌 사건 내막이 모두 포함돼 있다.

[일요서울]은 1, 2부에 걸쳐 이근안 전 경감의 직격토로를 지상 중계한다. 1부는 이근안 전 경감의 근황과 과거 잠적, 수감생활을 담았고 2부는 김근태 사건, 남민전 사건 등 그가 담당했던 공안 사건 비화를 다룰 예정이다.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전 경감과의 대화는 일문일답으로 엮었다.

1980년대에 태어난 기자에게 ‘이근안’이란 이름 석자는 막연한 ‘비호감’이었다.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온갖 잔혹한 수법으로 짓밟은 고문 전문가.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여전히 냉정한 까닭이다.


“‘박종철 살인자’ 누명 억울해”

- 지난달 “나는 고문기술자 아니다” 발언 뒤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다.
▲ 그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직접 인터넷에 접속해 댓글을 꼼꼼히 읽어봤다. 대부분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쓴 것 같더라.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건데 괜한 일에 나섰다는 후회도 했다. ‘쿨TV’(해당매체) 인터뷰 이후 유명 잡지사와 일간지의 섭외 요청이 쇄도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다시는 언론에 얼굴 내밀 일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지금 또 기자 앞에 앉아 있으니 아이러니다.

-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고 알려질 정도로 외부 접촉을 극히 피해왔다. 최근 공개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 여전히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렵고 꺼려진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7일자 <조선일보>(만물상-‘귀환납북자들의 수난’)를 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모 논설위원이 쓴 글이었는데 내가 납북어부 김성학씨를 간첩으로 몰아 모진 전기고문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김씨의 허리가 만신창이가 됐다고 쓰여 있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김씨의 허리병이 고문후유증 때문이 아니라 ‘디스크’로 인해 생겼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글은 또 다른 납북어부들 사례 4건을 언급하며 역시 내가 그들을 모질게 고문해 고통을 줬다는 식으로 풀어갔다. 중요한 건 ‘수사관 이근안’은 그들을 조사한 적은커녕 일면식조차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이 내게 한 가장 서글픈 질문이 뭐였는지 아나. “죄 없는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은 왜 죽였느냐”며 날 살인자 취급할 때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박종철 사건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사건은 당시 치안본부 관할이었고 난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으로 소속 자체가 달랐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도 ‘고문’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언론은 이근안을 팔았다. ‘더 이상 당하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에 하소연하고 싶었다. 마침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응했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언론지상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


“도피시절 직속상관이 준 건 떡볶이 한 접시”

- 11년 간 이어진 도피와 관련된 의혹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당국의 도움 없이 개인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추적을 피해 잠적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 무려 11년 동안 내 집 천장에 갇혀 송장처럼 살았다. 아내와 둘째 며느리가 하루 두 끼씩 천장으로 몰래 실어 나르기를 10년 넘게 한 셈이다. 내가 자살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얼굴을 뜯어고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피기간 내내 집을 떠난 적이 없다. 수사팀도 ‘설마 자기 집에 숨었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계산하고 거기 숨은 건 아니다.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오갈 곳 없는 처지가 되니 발걸음이 저절로 집을 향했을 뿐이다. 물론 검찰의 감시는 철통같았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수사관이 들이닥쳐 양복장 안, 행거 사이에 몸을 숨긴 적도 있다.

- 일부 언론에서는 ‘당시 경찰 간부가 도피를 도왔다’고 보도했다.
▲ 경찰 윗선이 날 도왔다고? 거짓말이다. 조직은 철저히 날 버렸다. 11년 간 천장에 숨어사는 동안 날 찾아온 건 ‘바퀴벌레’ 뿐이었다. 물론 수배되기 직전 당시 내 상관이었던 박처원 단장(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에게 “잠적하겠다”는 말은 한 적이 있다. 조직의 허물을 내가 모두 지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박 단장과 내 인연은 끊어졌다. 박 단장 부인이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몇 번 찾아온 적은 있다. 내가 복요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음식점에서 복어탕을 포장해 온 게 두 번, 집 앞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 한 접시를 권한 게 박 단장이 내게 보인 유일한 성의였다.

- 경찰조직이나 정권 차원의 비호가 전혀 없었다는 건가.
▲ 물론이다. 스스로 가슴에 못 박는 소리지만 난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특히 내 직속상관이었던 그분(박처원 단장)이 적어도 한 번은 날 찾을 줄 알았다. ‘고생했다’는 한 마디 쯤은 해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지인을 통해 박 단장이 재작년 세상을 떠났다는 얘길 들었다. 끝까지 난 조직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셈이다.

- 당시 검찰이 도피자금의 존재를 일부 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 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아내에게 건넨 생활비를 검찰이 ‘도피자금’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경기도경 대공분실장 재직 당시 내 휘하에 부하직원들이 27명 정도 있었다. 내가 도망자 신세가 된 이후 조직은 풍비박산이 났다. 날 따르던 후배들은 잇달아 지방으로 좌천되고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대공수사관들 사이의 ‘의리’는 특히 돈독하다. 후배들이 우리 집 사정을 알고 십시일반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생활비조로 준 것이다.


막내아들 “죽어도 아버지 덕 안 봅니다”

- 퇴직과 오랜 잠적, 수감생활로 가족들의 생활도 상당히 어려웠을 듯 하다.
▲ 말로 해 뭐하나. 가족 앞에서 나는 그저 죄인이다. ‘고문 기술자’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특히 둘째 며느리에게는 고마움과 함께 미안함을 숨길 수 없다. 일찍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처지에 여태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

- 둘째아들이 수감 도중 세상을 떠났다.
▲ 둘째가 아들 셋 중에도 특히 착했다. 매주 면회를 오던 둘째 놈이 어느 날 “아부지, 나 오래 못살 것 같아요.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안 좋습니다”하며 침울해 했다. 평소 당뇨가 있긴 했지만 나이가 젊어(당시 39세) 설마 했다. “아비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마라”며 호통을 쳤는데 꼭 한 달 만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 자수를 결심했을 때 막내가 군복무 중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 수배령이 떨어졌을 때 막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자수하기 직전 전역했다. 내가 감옥에 간 뒤 막내는 주위 시선 때문에 학교도 그만뒀다. 지금은 노동일로 처자식을 부양한다. 어린 손주 때문에라도 번듯한 회사에 취직시켜주고 싶어 지인을 통해 자리를 알아봐줬는데 단박에 거절했다. “죽어도 아버지 덕은 안 본다”며 노동판에 나가는 막내 녀석이 야속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이근안 목사로 불러 달라”

- 2008년 정식으로 목회자가 됐다. ‘목사’와 ‘경감’ 중 어떤 호칭이 더 편한가.
▲ 목회활동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근안 목사’가 맞지 않겠는가. 경감은 30년 전 직함일 뿐이다.

- 목사안수 당시 찬반여론이 거셌다.
▲ 내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 가타부타 논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분 뿐이라 생각한다. 2008년에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적잖은 언론사가 취재를 나왔다. 인터뷰 요청이 있었지만 한번도 응하지 않았다. 이후 신문과 뉴스에 내 신학대학시절 리포트와 시험 성적이 공개됐다. 신심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에 귀의한 만큼 사람들의 비난에 움츠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내게 관심이 쏠린 것은 의외였다.

- 수감생활 중 종교에 귀의했다고 들었다.
▲ 정확하게는 도피 중이던 98년 이후다. 어둡고 눅눅한 천장에서만 생활하다 어느 날부터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부친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손때가 묻은 성경책에 손이 갔다. 이후 10년 동안 노트에 3400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손으로 베껴 쓰며 공부했다. 자수를 결심한 것도 성경 공부를 한 덕분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란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을 받아 적으며 나 역시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 과거 스스로의 행동이 ‘죄’라고 생각하는가.
▶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산다. 내 경우엔 시대가 나를 죄인, 역적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잣대는 분명히 다르다. 유신정권 시절의 ‘애국’이 지금은 천인공노할 죄가 된 걸 보면 모르겠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사진=맹철영 기자] photo@dailysun.co.kr


#이근안, 그는 누구인가

고난도 고문기술 ‘관절빼기’의 명수로 알려진 그는 유신정권 시절 최고의 ‘고문기술자’이자 뛰어난 대공수사관으로 평가받았다. 1970년 경찰에 입문한 뒤 줄곧 대공분야에서 일했으며 공식적으로는 4건의 간첩검거 유공을 포함해 16차례의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경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간첩검거 실적은 공식발표보다 더 많다”고 밝혔다)

뛰어난 수사실력으로 당시 경찰 내에서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수사가 안 된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근안 전 경감은 민청학련 의장이었던 김근태 전 장관 등 수많은 민주화인사들을 잔인하게 학대한 혐의로 11년 가까운 도피생활과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지난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