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어린이 살해사건’ 속 김길태 있다

지난 12일 여중생 납치 살해피의자 김길태(33)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부산 사상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위) 지난 2008년 안양 초등학생 살해사건의 용의자 정 모 씨가 경기 수원 호매실동 야산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부산 여중생 납치피살 사건’ 피의자 김길태(33) 얼굴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파렴치한 범죄행각만큼이나 그의 행색은 남루하고 더러웠다. 지난달 말 이후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한 사건에 대중의 공분이 끓고 있다. 무엇보다 숨진 피해자 몸에서 자신의 유전자 정보(DNA)가 발견됐음에도 “나는 죽이지 않았다”며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는 김에게 시민들은 분노와 역겨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태도로 미뤄 김이 충동적이고 죄책감을 모르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2008년에도 어린 소녀를 납치해 성적으로 유린하고 잔혹하게 살해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바로 ‘안양 어린이 납치피살 사건’ 범인 정성현(41·사형확정)이다. 두 어린이를 살해한 뒤 시신을 갈가리 찢어 유기한 그에 비해 김길태의 범행수법은 ‘다운그레이드’(downgrade·등급, 수준 등을 격하시킴)된 면이 적지 않다. 정성현과 김길태는 닮은꼴임과 동시에 다른꼴이라는 얘기다. 김길태의 입이 굳게 닫힌 상황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번 사건과 유사한 이전 범죄, 그 범인에게서 김의 속내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검거 이후 김길태는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그는 “피해자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실종 전단지에서 처음 봤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김이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미 확보된 상태다. 숨진 피해자의 몸에서 김의 흔적이 나온 것. 무엇보다 그 흔적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유전자 정보(DNA)라는 점에서 그가 혐의를 피해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난 11일 김영식 부산지방경찰청 차장은 브리핑에서 “김길태를 검거할 당시 구강 상피세포에서 채취한 DNA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 의뢰한 결과 피해자 몸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했다”며 “(김이 범인이라는)직접적인 증거가 확보된 셈”이라고 밝혔다. 이는 피해자 이모(13)양을 성폭행하고 숨지기 직전까지 접촉한 사람이 바로 김이라는 것을 뜻한다.

상당수 피의자들이 결정적 물증 앞에 고개를 숙이는 반면, 김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이양 몸에서 자신의 DNA가 나왔다는 얘기에도 “잘 모르겠다. DNA가 뭔지도 모르겠고 법대로 하라”며 맞섰다.

안양 어린이 살해범 정성현도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보였다. 그 역시 체포된 순간부터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두 어린이가 실종된 2007년 12월 25일 당일 행적에 대해 알리바이를 주장하며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혐의 부인, 정성현도 그랬다

그러나 이후 당일 렌터카 대여 기록과 두 어린이의 혈흔 등 물증이 쏟아지자 정은 말을 바꿨다. 피해어린이들이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당시 정성현의 심리분석을 담당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소속 권일용 경위는 이에 대해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한 시도”라고 분석했다.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범죄분석요원)인 권 경위는 이번 김길태 검거 과정에서도 탁월한 직관력을 발휘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정성현은 살인을 인정한 뒤에도 이를 ‘사고’ ‘실수’로 위장하려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실수로 범죄를 합리화하고 여론의 지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얘기다.

권 경위는 지난해 한 수사전문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성현이)조사 도중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세상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는다’는 표현을 하면서도 ‘유일하게 나를 믿어주는 지인에게는 어린 애를 성폭행한 범죄자로 알려지는 것이 두렵다’고 토로했다”며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자기 문제에만 신경을 쓰는 특성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런 특성은 연쇄살인범 유영철, 정남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김길태는 타인의 이목보다 자신이 받을 처벌과 이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김이 이번 사건 범인으로 확정되면 ‘강간살인’ 또는 ‘강간치사’ 혐의로 무기징역 혹은 최고 사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이미 1997년과 2001년 두 번의 성폭행 관련 전과가 있어 가중처벌을 피할 수 없다. 앞선 사건 때도 김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었다.

전문가들은 김길태가 이 사실을 잘 알고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표창원 경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그가 범행을 계속 부인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 의도적 망각을 시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자백해도 감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부터 살인은 없었다’는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걸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도주 중 붙잡힌 범죄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길태의 버티기는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표 교수는 “피의자(김길태)의 의지가 강한 것 같지 않다.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조만간 심리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김이 살인 혐의를 인정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다만 정성현처럼 ‘우발적’ ‘사고’ 등의 핑계를 앞세워 범죄를 합리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양 사건으로 김길태 읽기

2008년 3월 정성현이 검거된 지 불과 열흘 만에 어린 소녀를 표적으로 한 강력범죄가 또 벌어졌다. 일명 ‘일산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이다. 다행히 피해 어린이가 납치 직전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 했지만 당시 피의자 이명철(43·구속수감)의 범행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기록돼 언론에 공개되면서 엄청난 사회적 충격을 던졌다.

연달아 벌어진 두 사건은 피해자가 저항 능력이 부족한 10세 전후의 여자 어린이였다는 점을 포함해 유사점이 많았다. 가해자가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중년남성이며 성폭행이 범행의 주된 동기였다는 것. 또 가해자가 범행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김길태 역시 앞선 범죄자들과 공통점이 적지 않다. 중학교 시절 부모가 이혼하고 계모슬하에서 자란 정성현처럼, 김은 어릴 때 친부모에게 버려져 양부모 밑에서 컸고, 고교생 때 이 사실을 안 뒤 불량학생으로 전락했다.

‘은둔형 외톨이’로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 역시 같다. 정은 이웃과의 왕래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냈다. 김길태도 줄곧 소년원과 교도소에 갇혀 있었고 출소 이후에도 자신의 옥탑방에서 수개월동안 칩거하는 등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해왔다.

특히 두 사람이 상습 성범죄자였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정성현은 안양 사건 이전인 지난 2004년 노래방 도우미였던 40대 여성을 모텔에서 성폭행한 뒤 살해, 암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김길태 역시 1997년 9살 어린이를 성폭행하려한 혐의로 3년 간 수감생활을 했고 2001년엔 30대 여성을 감금한 상태에서 겁탈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 1월에도 또 다른 부녀자를 납치해 성폭행해 지명 수배된 상태였다.

납치와 감금, 성폭행 등에 그치지 않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 김의 범행 동기는 닮은꼴인 정성현을 통해 일부 유추할 수 있다. 정은 피해어린이를 성추행한 뒤 이 사실이 부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살인을 저질렀다.

김 역시 비슷한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의 사망시점이 경찰의 공개수사 이후일 수 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옴에 따라 그가 죄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공산이 크다. 이는 추후 경찰 수사의 허점으로 지적될 소지가 다분하다.

정성현은 사춘기시절 친모로부터 버림 받았고 성인이 된 이후 교제했던 여성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실연을 당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경험이 여성에 대한 왜곡된 편견이나 증오심을 키웠고 약한 여자어린이를 상대로 표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김길태 역시 10대 시절부터 갖가지 범죄로 수용시설을 들락거린 이후 제대로 된 이성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다. 자신을 버린 모성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경제적 능력도, 여성의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는 그가 이성과 접촉하는 방법은 납치와 감금이 유일했을 수 있다.


#범죄꾼 김길태, 착실히 진화했다

1997년 성폭행 미수→2001년 감금·성폭행→2010년 납치·강간살인

언론에 알려진 김길태의 IQ는 86. 평균구간을 밑도는 수치로 대중들은 그가 우둔한 범죄꾼이라는 데 동의했다.

실제로 그는 족적과 DNA 등 결정적인 단서를 남겨 검거를 자초했다. 김은 ‘한국의 테드 번디’ 강호순(41·사형확정)처럼 증거를 인멸할 능력도, 선량한 척 자신을 포장하는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른바 ‘범죄내공’이 쌓일수록 김길태의 범행수법이 착실히 진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0대 시절부터 절도, 폭력, 성폭행 등 종목을 불문하고 습관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던 그가 범행 경험이 쌓일수록 치밀한 수법을 구사하게 됐다는 얘기다. 만약 이번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김은 더욱 치밀한 ‘완전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른다.

그는 19세였던 1996년 9살 어린이를 겁탈하려다 실패했다. 그런데 출소 이후인 2001년 그는 새벽기도를 가던 30대 여성을 흉기로 위협, 9일 동안 감금하고 성폭행했다. 저항능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인 여성을 상대로 목적을 이룬 것이다.

지난 1월 또 다른 여성을 감금·성폭행한 김은 아예 경찰의 수배를 피해 수개월 간 도피하기도 했다. 검거망을 피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범행이 된 이번 사건에서는 마침내 살인까지 저질렀다. 13년 만에 ‘성폭행 미수범’이 ‘강간살인범’으로 훌쩍 자란 셈이다.

시신을 유기하는 방법에도 치밀함이 더해졌다.

알몸의 피해자를 노끈으로 결박해 검은 비닐봉투에 싸고 남은 옷가지는 따로 봉투에 넣어 남의 집 빈 물탱크에 숨겼다.

시신을 담은 봉투 위에 횟가루를 뿌려 증거인멸을 시도한 흔적도 있다. 소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비닐봉투와 노끈 등 필요한 장비를 미리 준비한 것으로 미뤄 시신 유기는 미리 계획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김길태 붙잡은 부산 경찰 여론 뭇매

부산 여중생 이모(13)양 납치 살해 용의자 김길태를 붙잡은 부산 경찰의 어설픈 수사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양 사건으로 빗발치는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는 부산 사상경찰서와 부산경찰청은 초상집 분위기다.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이양의 목숨을 살릴 수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서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 수사의 실책을 엄중히 가려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경찰 수사가 허점투성이였다는 사실이 하나 둘 씩 드러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김씨의 조속한 검거가 가능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운전면허가 없어 운전을 못하고 범행이 일어난 사상구 덕포동 지리에 밝아 이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경찰은 김씨를 잡지 못했다.

또 저인망식 수사가 수박 겉핥기식이었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범행이 일어난 덕포동 재개발지구엔 문이 잠긴 빈집이 많았다. 경찰의 검거작전을 비웃듯 김씨는 이양의 집에서 100m 떨어진 무속인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기도 했다. 수만명을 동원했다는 경찰의 ‘저인망식’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사는 이유다.

최근에는 이양의 살해 시점이 논란이다. 한 언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양은 실종 후 일주일 동안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은 “아직 모르는 일”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만약 실제로 이양이 일주일간 생존해 있었다면 경찰의 공개수사로 심리적 압박을 느낀 김씨가 이양을 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경찰이 이양을 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찰은 이양의 생존 기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부검결과 이양이 일주일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날 경우 수사 책임자와 더불어 부산 경찰청 고위 간부까지 징계를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윤>


###“김길태 얼굴공개, 예비 범죄꾼에 ‘롤모델’될 수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형민 박사 “모방범죄 예방과 연관성 적어”

강력사건을 비롯한 각종 범죄행위 중 모방범죄가 발생하는 사례는 상당히 흔하다. 범행수법을 베끼고 진화시키는 ‘카피캣’의 출몰은 범죄세계에서 절대 특이하거나 드문 현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원은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자신이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며 “다른 이가 비정상적인 방법(범죄행위)이나마 이를 충족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이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흉악범에 대한 얼굴, 신상공개가 모방범죄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박 연구원은 또 다른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흉악범죄자의 얼굴, 신상공개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흉악범의 얼굴과 신상이 공개됐을 때 비슷한 욕망을 가진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구체적인 ‘롤모델’을 제시하는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범죄자 신상공개가 여러 순기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모방범죄 예방’이라는 측면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게 박 연구원의 주장이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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