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의 실책은 내치의 실책보다 ‘치명적’

고교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가장 재평가가 필요한 역사 인물’을 꼽는 설문조사에서 광해군(光海君, 재위기간 1608〜1623)이 1위를 차지한 흥미로운 결과가 있다. 광해군 사후 400년이 지난 지금, 명·청이 패권을 다투기 시작하던 광해군 시절의 상황은 동북아에 긴장이 고조되고 여야가 대립하는 요즘과 흡사하다.
어떤 지도자도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다. 그의 업적으로는 전쟁을 미연에 방지한 중립외교, 대동법, 《동의보감》 등을 꼽을 수 있고, 실정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살해, 대규모 토목공사 등을 들 수 있다.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탁월한 실리 외교를 펼쳐 미증유의 국난을 막는 업적을 남긴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외교내치(外交內治)의 동일시 전략이다. 광해군은 분조(分朝) 체험에서 우러난 외교전문가의 자질을 발휘해서 외교는 곧 내치의 연장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정사를 폈다. 취임 이듬해인 1609년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대륙정세의 정보수집에 노력했다. 아울러 자강책을 병행, 조총 화포 등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명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뒤로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 틈을 타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1616년 후금(後金)을 세웠다. 후금과 명이 대립하던 시절 조선은 광해군의 실리 외교 덕에 전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다.

둘째, 명·청(明·淸) 등거리 양단외교(兩端外交) 전략이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 명은 후금을 치겠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파병하여 조선을 구해 준 대가, 즉 ‘재조지은(再造至恩)’을 요구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군사들의 훈련부족과 명나라 파병요청 문서의 명의가 황제가 아닌 점 등을 이유로 명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여 명의 병사를 파견, 전투에 적극 나서지 않고 슬그머니 빠지는 전략을 구사해 후금과 충돌을 피한 것이다.

셋째, 백성 편에 선 세제개혁 전략이다. 광해군은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주력, 농지개간을 장려하고 양안과 호적을 정리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였다. 여기에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것을 쌀 등으로 대신하게 한 대동법을 실시해 민생안정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 광해군은 애민군주, 개혁군주로 백성들에게 각인되었다. ‘대동(大同)’이란 용어는 신분적 차별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영의정 이원익이 선혜청을 설치해 시행한 대동법은 호별이 아니라 토지 면적에 비례해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농민 부담은 줄고 지주 부담은 늘었다. 지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엔 100년이 걸렸다. 대동법은 기득권층의 반발에 막혀 실시하지 못했던 세제개편을 본격적으로 단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광해군의 급진적 개혁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폐모살제(廢母殺第: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살인, 계축옥사癸丑獄死)를 명분으로 내세워 광해군을 축출하는 인조반정(1623)을 일으켰다. 광해군의 비극적인 일생에 대해 사학자 이덕일은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하지 못한 군주의 비극”이라고 탄식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반작용은 너무 가혹했다. 인조와 서인은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돌아섰다. 후금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범했고, 조선은 역사상 유례를 보기 드문 참혹한 재앙을 맞이하게 됐다.

동북아 패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미·중·일·러 가운데 한반도가 있다. 4강 사이에 낀 한국의 외교는 필연적으로 유연함을 요구한다. 외교의 실책은 내치의 실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진리를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통해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종철 전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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