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범 속여 “돈벌게 해주겠다” 기묘한 동업

채권자의 가족을 해외에서 납치·감금해 돈을 갈취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김학석 부장검사)는 투자손실을 내고 해외로 도피한 펀드매니저의 동생을 납치ㆍ감금하고 돈을 뜯어낸 혐의(인질강도 등)로 남모(31)씨 등 대전지역 폭력조직원 2명과 김모(36)씨를 구속기소했다. 이들은 사설 펀드매니저 정씨(31)가 지난 2008년 투자자의 돈을 빼돌려 해외로 도피하자 동생인 정씨(28)를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납치·감금·협박해 돈을 뜯어낸 혐의다. 이 사건의 흥미로운 점은 납치를 당한 정씨의 형인 정모씨와 김씨가 최근까지 자동차수출 사업을 동업을 했다는 점이다. 사건발생 2년 만에 드러난 펀드매니저 동생 납치사건 전모를 알아본다.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김학석 부장검사)는 사설 펀드를 운영하다 투자손실을 내고 지난 2007년 해외로 도피한 펀드매니저 정씨(31)의 동생을 납치·감금하고 돈을 뜯어낸 혐의(인질강도 등)로 대전지역 폭력조직원인 남모(31)씨 등 2명과 김모(36)씨를 구속기소했다고 지난 6월 4일 밝혔다.


만년백수, 사짜 펀드매니저로 다시 태어나

검찰에 따르면 남씨 등은 2008년 4월, 주식투자로 20억여 원을 잃은 익명의 한 투자자로부터 정씨의 가족을 납치하라는 청부를 받는다.

남씨는 미국에 거주하는 정씨의 동생이 일본에 사촌누나를 만나러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일본에 불법체류하고 있는 김씨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당시 사업이 어렵던 김씨는 남씨의 제안을 받고, 정씨 동생 납치해 합류한다.

사건당일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동생 정씨를 권총으로 위협해 납치한다.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형에게 전화해 "돈을 보내지 않으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정씨를 협박해 석방을 대가로 3억5000만 원을 뜯어낸다.


인질범과 ‘호형호제’하게 된 내막

그러나 협상과정에서 정씨와 김씨는 친해진다.

이때 정씨는 김씨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주식 등 돈을 벌수 있는 투자 정보를 주는 대가로 동업을 제안한 것.

지난 5월 18일, 서울 수서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김씨는 “정씨가 다른 투자자로부터 온갖 협박에 지쳐 있었다. 동생의 몸값을 요구하던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 인질 몸값으로 준 돈으로 동업을 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눈물로 사정하기에 인간적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씨와)동업하면 투자 정보도 얻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동업을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둘은 중국에 자동차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 사이 정씨에게 투자자들의 빚 독촉도 심해졌다.

김씨는 “투자자들의 빚 독촉에 정씨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 그러자 정씨가 나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생활비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백수 꿈 벗던 펀드매니저, 결국 빚 수렁에

일본 오사카에서 불법 체류하던 김씨는 일본인 명의로 위조된 일본 여권을 발급받아 지난2008년 8월부터 최근까지 9차례에 걸쳐 한국에 불법 입국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정씨의 삶도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정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보내다 사설 펀드매니저의 길을 간다. 그는 개미(소액투자자)들을 모아 투자하는 ‘롤링매니저’였다.

영화배우처럼 화려한 외모에 탁월한 입담을 가진 그에게 현혹되어 많은 사람이 투자를 한다. 투자자들 가운데는 폭력조직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적게 1억 원에서 많게는 수십 억 원을 정씨에게 투자했다.

전문적으로 투자 공부를 하지 못한 정씨는 금세 밑천을 드러냈다. 계속되는 투자금 손실로 사채업자와 채권자 등으로부터 압박이 들어왔다.

수시로 채권자들이 정씨의 집에 들이닥쳤다. 가족들은 채권자들로부터 살해협박까지 받게 됐다. 결국 정씨는 투자자들의 계좌에서 몰래 24여억 원을 인출한 뒤 부모와 동생을 데리고 미국 올랜도로 도피했다. 거기에 정착할 생각으로 작은 집을 구한다. 하지만 급히 관광비자만 받고 온 터라 정씨 가족 모두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살 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중에 지난 2008년 4월 18일 오후 8시 30분께 사촌누나를 보러 일본에 간 정씨의 동생(27)이 인질범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납치사건이 계기가 되어 인질범인 김씨 등을 만나게 됐고, 자동차수출 동업사업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사업이 순탄하지 못했다. 빚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던 정씨는 결국 자수해 구속된다.

현재 그는 현행법에 금지된 사설펀드를 운영하고 투자금 일부를 빼돌린 것으로 파악됨에 따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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