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향한 행진곡’이 가장 힘을 얻고 유명해졌을 때가 언제인가.
당연히 2004년 노무현 정권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청와대에 모여 대통령과 함께 이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난 후부터였다. 이 사건 뒤 좌파세력은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을 대표적 친일파로 규정했고, 이 기회에 애국가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특히 경주 출신의 대표적 좌파로 나선 유시민 씨 같은 이는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것은 군사독재와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아서 생긴 파시즘의 잔재”라고 했다는 게다. 그로부터 10년 안 돼서 합법적 공당으로 발전한 종북정당 통진당의 이석기가 가슴에 대한민국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므로 차라리 ‘아리랑’을 부르자”고 나섰다.
급기야 서울시 교육청이 음정을 3도 낮춘 맥없는 애국가를 보급하려고 시도했다. 대한민국 정서를 뿌리째 흔들어 놓으려는 산술적 음모가 차곡차곡 큰 저항 없이 진행돼온 셈이다. 투쟁적 소재의 소설로 유명한 황석영 씨는 다섯 차례나 방북(訪北)해 일곱 번이나 김일성을 만나고 25만 달러를 받아 5.18 선동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이 영화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삽입됐음은 불문가지다. 음악을 담당했던 사람은 알려진 대로 김일성을 흠모한 윤이상이었다. 어느 국회의원은 이 노래가 북한에서도 금지곡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린 잘 모른다. 다만 이 땅의 좌파가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현상이 더욱 중대하다는 뜻이다.
지금은 1980년대 군부독재 시대가 아니다. 그때의 잿빛 하늘 아래서 부르던 이 노래와는 절대로 의미가 다르다. 이 아픈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국민이 어디 있을까. 우리가 결코 혼돈치 말아야 할 대목은 국가(國歌)는 그 나라를 상장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노래다. 이에 비하여 애국가는 공식, 비공식 여부를 떠나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애국가는 ‘배재학당’의 애국가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갑오경장 이후 여러 애국가가 널리 불리기 시작해서 1896년 2월 갑오개혁운동이 큰 성과 없이 끝나버리자 각 지방에서 불린 애국가 종류가 10여 개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이 세계열강과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됨에 따라 개화에 눈을 뜨게 되면서, 애국애족 사상의 뜻깊은 애국가가 도처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벌써 3년째 두 곳에서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공식기념식에는 5.18 유가족과 지역 시민단체나 지역 정치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은 같은 시간에 옛 전남도청 앞 민주평화광장에서 별도의 행사를 치렀다. 공식행사와 유가족이 치르는 이 별도의 행사가 어느새 3년째 됐지만 이 뼈아픈 현실을 진정으로 개탄하는 기색이 안 보인다. 지하의 영령들보기 민망스럽다는 생각마저 안 드는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 때문이라니 어느 국민이 이 아픈 진실을 모른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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