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학대가 김길태의 심장 멈추게 했다”


부산 여중생을 살해사건 피의자인 김길태(33)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범행일체를 부인하고 사형선고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 그랬던 김길태가 부산교도소에서 박찬종(71)변호사를 두 차례 만난 자리에서 본인의 삶을 말했다. [일요서울]은 박 변호사를 통해 김길태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을 들어봤다.


부친에게 폭행당한 어린 시절

“마치 남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길태를 만나고 온 박찬종 변호사의 말이다.

박 변호사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사회 부적응이 범행의 주요 원인”이라면서 “우리 사회가 저소득·저학력 계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면 제 2의, 제 3의 김길태가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길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 폭행당했다.

유년기의 김길태는 아버지가 너무 심하게 때려 ‘아버지는 아들을 때리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졌다. 간혹 친구들이 아버지로부터 혼나거나 맞는 걸 보면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받는 김길태를 가엾게 여기고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 줬다.

김길태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부모의 대화를 엿듣고선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적개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양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때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아버지한테 맞는 것이 더 서러워졌다.

이때부터 ‘집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집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마음 역시 늘 불안정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체격이 커지자 아버지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김길태를 때리지 않았다.


순탄치 못했던 학교생활

김길태는 부산 S중학교에 진학했다. 신설 중학교로 선배가 없었다. 중학교에서는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문제는 고등학교 진학 후 발생했다. 김길태는 학군제에 따라 부산의 상업계 고등학교인 K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곳에는 중학교 시절에는 없었던 선배들이 있었다. 선배들 중 몇몇이 김길태를 불러 폭행하기 시작했다. 한번 표적이 되자 학교에서 맞는 것이 일상이 됐다.

집과 학교 둘 다에서 겉돌기 시작한 것이다. 두 달 만에 학교를 무단으로 결석했다. 결국 학교에서는 10월에 정식으로 퇴학 처리가 됐다.

김길태는 퇴학 후 고물상에서 빙수기계와 고구마 굽는 기계를 샀다. 그것으로 여름에는 빙수를 팔고 겨울에는 군고구마를 팔아 수입을 올렸다. 그러다 1994년 10월 돈과 옷을 훔쳐 한달여 간 구속 수감됐다.

그 후 부산 사상구의 유흥가 일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손님들의 심부름과 호객행위로 일당을 받고 그것으로 생활을 했다. 그 사이 김길태는 폭행으로 소년원을 두 차례 다녀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길태와 성폭행은 접점이 없었다.


교도소에서 11년…사회 냉대

김길태는 1997년 7월 아동강간미수 혐의로 붙잡혀 징역 3년을 살게 된다. 2001년 4월 출소해 유흥가 일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달 후인 2001년 5월경 32세 여성을 납치해 10일간 감금·성폭행해 징역 8년을 살았다. 이에 대해 김길태는 성폭행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피해 여성과 피해 여성 집에 같이 간 일도 있다며 지방 법원에서 거칠게 항의했다. 이 같은 태도에 검사 구형보다도 높은 12년이 선고됐다. 결국 고등법원으로 가서 8년이 선고됐고 8년간 징역을 살았다.

감옥살이 중 만기 2년을 남겨놓고 김길태는 환청·환각상태에 시달렸다. 이에 김길태는 결핵 및 정신질환 수형자들을 집금·수용관리하고 있는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진주교도소는 우리나라 유일의 의료교도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한 달에 한번 외부에서 의사가 와 10초간만 진료를 하고 약을 처방해줬다고 한다. 처방받은 약은 일종의 수면제로 복용 후 사지가 늘어지고 하루 종일 몽롱했다.

김길태는 11년간의 징역살이에도 단 한 번의 직업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고작 받은 교육이라곤 봉투로 풀붙이는 것이었다고. 하루 종일 봉투에 풀을 붙여도 3만원 꼴로 생계에 도움이 전혀 되지 못했다. 실용적인 기술들을 전혀 익히지 못한 셈.

박 변호사는 “금년 교도소 예산이 38억 원으로 1인당 11만원 꼴이다. 기결수 3만 5000명 중 직업 훈련을 받은 사람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며 “예산도 적을뿐더러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이나 관리 재 교화 시스템은 백지상태”라고 지적했다.

2009년 6월 만기 출소한 김길태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경기도 의왕 물류센터에 취직했다. 50일간 일해 170만 원을 벌었다. 하지만 곧 전과 사실이 들통 났다. 김길태의 전과를 꺼림칙하게 여긴 회사는 곧 김길태를 해고했다. 익숙한 부산으로 돌아온 김길태는 사상 근처를 맴돌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냉대 속에 사회와 단절된 채 지내다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됐다.

박 변호사는 “의무과정인 중학교 3년 과정에서 탈락자는 거의 없다. 180만 고등학생 가운데 중도 퇴학하는 학생이 1년에 1만 5000여 명이다”라면서 “대졸 취업난도 극심한 마당에 고교 중퇴자의 사회생활은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사회가 모른 척 하고 방임하는 사이 고교 중퇴자들이 사회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소년범은 2007년 27%에서 2008년에는 53%로 증가했다. 이처럼 해마다 두배 가까운 증가추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고교 중퇴자 증가에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역시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면서 “범죄자가 사회에 나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정행정이 변해야 한다.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범죄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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