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국무회의에서 여의도와 전쟁을 선포했다. 여야 국회의원 3분2 이상이 찬성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하면서 국회는 당리당략에 빠진 구태정치 집단이자 배신의 정치가 난무하는 곳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무엇보다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해야 할 집권 여당 원내사령탑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며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압박했다. 박 대통령이 유례없이 집권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에까지 맹공을 퍼부은 데에는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뜻이 숨겨 있다. 과거 2004년 여름 구례연찬회 때 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을 이재오, 김문수 등 친이계 인사들이 ‘독재자의 딸’, ‘유신사과 요구’하며 대표를 흔들 당시 30분간 작심 발언과 매우 유사하다는 평가다.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쏟아낸 강경 발언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봤다.

- ‘승부수’ 띄운 박 대통령, “더 이상 안 밀린다”
- 2004년 구례연찬회 “비주류 떠나라” 폭탄발언 연상

여야가 합의해 정부에 이송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던진 대국민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대통령과 정부는 경제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는데 당리당략에 빠진 여의도가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며 경제살리기에 역행하고 있다. ▲ 정작 정부를 도와줘야 할 새누리당 원내사령탑은 오히려 야당과 함께 정부 행정업무까지 마비시키는 위헌적인 법안을 통과시켜 국가 위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 선거 승리만 생각하는 국회의원은 구태정치 집단으로 당선만 되면 배신의 정치를 일삼고 있으니 국민들이 심판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여기에 박 대통령 개인적인 소회도 들어갔는데 “나도 당했다” 내용이다. 박 대통령은 “당 대표로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당선의 기회를 달라고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이라며 더 이상 여의도 정치를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고 대국민 설득에 나섰다.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짧고 이해하기가 쉽지만 그 뒤에 숨겨진 승부수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박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 현실을 보면 녹록치 않다. 정부를 견제하려는 국회법 개정안을 수용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집권 5년중 반환점을 돌고 있는 박 대통령이다. 이제 남은 임기는 2년6개월뿐이다. 집권 초기에는 청와대·정부 인사 문제로 정신없이 보냈다. 집권 2년차는 갑작스럽게 터진 세월호 참사로 안전한 대한민국을 외치다 끝났다. 2015년 집권 3년차는 국정운영을 힘있게 출발할 사실상 마지막 연차인데 이완구 총리 낙마에 ‘메르스 여파’로 정국이 경색됐다.

“대통령인 나도 당했다” 여의도 정치 맹공

학수고대하던 미 순방은 연기되고 국정 지지도는 곤두박질치고 핵심 지지층 이탈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곧 국정운영의 동력 상실로 이어져 임기말 레임덕이 가속화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을 예고했다. 그런데 여야가 위기탈출의 장을 깔아줬다. 바로 국회법 개정안 통과로 박 대통령 특유의 승부수를 띄울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국회법 거부권 행사는 위헌적인 요소가 있는 만큼 명분이 있는 싸움이다. 또한 ‘거부권 행사’를 통해 추락한 대통령의 권위를 다시 세울 호재로 삼았다. 일단 박 대통령의 승부수는 성공한 듯 보인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물러난다’는 뜻을 밝히지 않은 대신 ”청와대 식구들과 함께 당청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한껏 몸을 낮췄다. 그동안 청와대와 정부의 개헌과 사드 그리고 증세·복지 논쟁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 유 원내대표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직격탄을 맞아 당분간은 집권여당 원내대표로서 입지가 축소될 공산이 높다. 오히려 친박계의 ‘유승민 책임론’ 재부상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또한 집권 다수당인 여당은 ‘재의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론을 정해 사실상 국회법 개정안은 폐기수순을 밟을 공산이 높아졌다.

박 대통령이 얻은 결과는 이뿐만이 아니다. 당내 비박 인사들에 대한 강한 드라이브를 통해 친박계를 결속시켜 의회 주도권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실 친박계는 갈수록 입지가 약화되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의 승부수로 당내에서 숨통이 틔게 됐다. 내년 공천권이 비박계인 김무성-유승민 투톱에 있어 눈치를 보며 ‘주친야비’(낮에는 친박 밤에는 비박)를 일삼아오던 게 친박계의 현실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청와대의 여의도 간섭정치는 당분간 심화될 공산이 높게 됐다.

또한 박 대통령은 대의회정치보다 대국민 직접정치에 나서면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동안 국정혼란의 책임이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기보다는 근본원인이 민생을 외면한 구태정치에 있음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여의도=국정혼란 세력’vs’대통령·청와대=민생안정세력’으로 전선을 형성했다. 이는 곧 국민여론에 기대어 핵심 지지층을 묶어내는 데 효과를 낼 전망이다.

이밖에도 박 대통령이 여의도를 떠났지만 여전히 새누리당 구심점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당원과 지지층에 각인시키는 효과도 톡톡히 봤다. 박 대통령의 발언 중 “당 대표로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무수한 어려운 고비를 넘겨서 당을 구해왔던 시절이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만이 남았다”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신정치를 토로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준비된 정면돌파는 과거 당 대표 시절에 한 번 있었다. 지난 2004년 8월 한나라당 구례 연찬회 장에서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후폭풍 속에 치러진 4월 총선은 한나라당 창당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그러나 ‘구원투수’로 나선 박 대통령으로 인해 열린우리당 152석 한나라당 121석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내홍은 연찬회장에서 계속됐다. 이재오 의원은 박 대통령을 ‘독재자의 딸’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2004년 한나라 2015년 국회 특유 승부근성

집권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도 ‘유신사과’를 요구했고 박 대통령은 사면초가에 빠진 가운데 의원연찬회가 열렸다. 이 의원을 비롯해 김문수, 홍준표 등 친이계 의원들은 연찬회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가운데 맨 마지막에 나선 박 대통령은 30분간 조목조목 친이계의 공격에 반박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신문제와 관련, “유신과 과거에 대해 사과하라고 하는데 여러번 사과를 했다”며 “나에게 사과하라고 한 분들은 순수한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반격했다. 박 대통령은 “어쩌라는 거냐.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냐. 흔들어서 내보내 대표를 하겠다는 얘기냐”며 이재오-김문수 의원을 향해 당권욕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대표직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정정당당히 하라”고 주문했다.

또한 박 대통령은 “나를 굉장히 혹독하게 비판하는 한 분은 '박근혜가 대표되면 탈당하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는데, 이것도 정정당당하게 하라”며 “탈당하겠다고 하면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지키고 책임을 져라”고 이재오 의원에 대해 자진 탈당을 압박하기도 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재야인사 출신으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이재오-김문수 의원 등을 향해 “3공부터 5~6공과 문민정부를 거쳐온 것이 한나라당의 역사인데 한나라당의 역사에 대해 굉장히 많은 비판을 하는 분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나라에는 열린우리당, 민노당 등 많은 정당이 있는데 그렇게 죄가 많은 정당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정당을 택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사실상 탈당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그렇게 죄가 많은 대통령(박정희 전대통령)이라고 하고, 같은 핵심에 있어서 같은 죄인이라고 한다면 지난 선거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안된다. 도와준다고 했어도 받아들이면 안되는 것이었다”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치사스럽고 비겁하다고 생각지 않나”라고 비난했다.

대통령, “공은 여의도로 넘겼지만…”숙제도

박 대통령은 “이분들은 북한의 북방한계선(NLL)침범이나 의문사위 사건에 대해선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다가 열린우리당에서 유신사과를 거론하니 똑같은 논조로 나를 비판했다”며 “이거야말로 대표 흔들기 아니냐”고 비판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열린우리당과 많은 부분 생각을 같이하고 있는데, 그럴 바에야 아까 이해봉 의원이 주장했던 것처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 하자는 말도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비주류 의원들이 계속 자신을 공격할 경우 함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장에서 연설한 16분과 당시 30분간 연설한 내용이 이재오에서 유승민으로 대상과 현안만 다를 뿐 비슷한 톤과 논조를 보이고 있다. 연찬회가 끝난 이후 탈당한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박 대통령의 승부수가 통한 셈이다. 그러나 만약 여의도가 재차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를 시도하고 통과가 된다면 박 대통령은 더 큰 승부를 봐야 한다. 당청이 험악한 분위기로 변한다면 박 대통령은 ‘탈당도 불사’할 태도다.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향후 친박·비박 간의 관계에 따라 당청관계도 중대 분수령을 맞을 공산이 높다. 반면 야당과의 관계복원 문제는 박 대통령의 숙제로 남을 전망이다. 

mariocap@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