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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애족심 바탕으로 자주적인 노선 강조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가난한 선비인 이경선과 김해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운 이후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이듬해 8월에 졸업하고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보복사건에 관련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며, 독립협회 간부로 정부전복 혐의를 받고 189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의 감형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이승만이 약관 30살이던 1904년 한성감옥에서 발간한 《독립정신》 中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신학문을 배워 경제적 이익을 외국인들에게 뺏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기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공적인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데서 우리는 청년 구국운동가의 국정철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나당연합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춘추처럼 한미동맹으로 자유통일의 기반을 만든 이승만은 5000천년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빼고는 대한민국을 논할 수 없다.

주한 미 대사를 역임한 무초는 “이승만은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다”며 이승만을 극찬했고, 공노명 전 외교부 장관은 “이승만은 가장 외교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대통령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이처럼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과보다 공이 훨씬 크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집권 12년 동안의 주요업적을 살펴보자.

‘정치 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수립했다. ‘군사 분야’에서는 북한 침략군을 격퇴하고 국군의 규모를 ‘63∼70만 대군’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단행하고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켜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78%에 달하던 문맹률을 퇴치하기 위해 의무 교육제도를 도입했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는 양반제도 타파, 남녀평등 교육기회 보장, 한글 전용 정책을 시행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의 업적은 ‘외교 분야’에서 그 빛을 발한다. 이승만은 1941년 6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출간, “머잖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 몇 달 뒤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였고, 이승만은 더욱 유명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 국제 사회로부터 승인을 받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주역은 이승만이었다. 비록 이승만의 임정 승인 획득 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한국의 독립이 미국에게도 중요하며, 한국인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기여하게 될 것, 소련이 한반도를 지배하고자 한다”는 점을 미국 지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아냈다. 이후 6·25전쟁의 휴전 과정에서 미국 위정자들을 설득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젠하워가 53년 휴전협상을 이승만에게 편지로 설득하자 그는 ‘휴전을 찬성하지는 않으나 묵인하겠다’며 세 가지 조건(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한국군의 현대화, 미 해·공군의 한국 잔류)을 내걸어 관철시켰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공노명 전 외교부장관 증언)

이처럼 이승만은 국제정치적 인식이 깊었으며, 애국·애족심을 바탕으로 자주적인 노선을 강조했다. 건국 대통령의 변변한 기념관 하나도 없는 대한민국이다. 자기 조국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애국심이 생겨날 수 없는 법이다. 건국의 역사를 바로 알려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건국의 원훈인 ‘이승만 바로 세우기, 복원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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