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잔 남자마다 복상사’ 일본 경찰이 생식기 적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

조선의 마지막 기생 ‘명월’의 삶은 기구했다. 명월과 동침한 남성들이 연이어 복상사(腹上死) 했다. 이후 명월은 마흔을 넘기지 못한 채 30대에 요절했다. 일제는 그와 동침한 남성들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시신을 부검, 그의 생식기를 적출해 보관했다. 이른바 ‘명월 생식기’로 불리며 최근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보관돼 왔다. ‘명월 생식기’의 존재는 지난 1월 재단법인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 등이 국과수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부장판사 임영호)에 “여성 생식기 표본 보관으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 재판부가 “표본 보관을 중지하고 폐기할 의무를 전제로 한 김씨의 위자료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그의 생식기 표본은 지난 6월 14일 폐기됐다. 기생 명월의 삶을 통해 일제의 인권유린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되짚어 본다.

‘명월관’은 1909년 문을 열었다. 처음 문을 연 곳은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 자리였다.

주인은 구한말 궁내부 주임관 및 전선사장을 지내면서, 어선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담당했던 안익환이었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궁중음식을 보급하겠다는 의도에서 요릿집을 열었다. 당시 장안에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그곳을 찾았고, 사교장으로 유명세를 탔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됐다. 이때부터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생겨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관기들이 명월관으로 유입됐다. 궁녀들까지 명월관으로 몰려오면서 이곳은 장안 최고의 명소가 된다.

명월관의 호황으로 장안 곳곳에 지점을 냈다. 또한 요릿집 창업이 러시를 이루며 봉천관, 영흥관, 혜천관, 세심관, 장춘관, 식도원, 국일관 등 요릿집이 곳곳에 생겨났다.

명월관에는 술꾼들과 기생들로 매일 밤 파티가 열렸다. 이곳 명월관에서도 가장 소문난 기생이 바로 ‘명월’이었다. 그의 실제 이름이나 예명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명월관’의 대표적인 기생이라는 점에서 명월로 통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그는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었다. 장안의 남성들이라면 그와의 하룻밤을 위해 수천만금을 뿌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하룻밤을 잤던 남성들이 잇따라 복상사를 하면서, 명월의 명성은 높아졌다. “얼마나 황홀한 밤이었기에 복상사를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 황홀한 밤을 위해 장안의 남성들은 불나방처럼 명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는 일본인 고위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일본 남성 역시 복상사로 사망했다.

남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명월은 단명했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복상사의 원인을 밝히겠다며 그의 시신에서 생식기를 적출해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보관했다.

이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1955년 국과수에 넘겨졌다. 지난 6월 폐기되기 전까지 국과수에서 비밀리에 보관돼 왔다.


‘기생 명월이’는 명월관 기생 ‘홍련’

기생 명월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일각에선 ‘명월’이 아닌 ‘홍련’이라는 기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 역시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

명월은 명월관 기생 ‘홍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일본인 화가 이시이가 1918년 조선을 방문했다가 만난 기생 홍련을 그린 ‘홍련화’를 증거로 내세웠다. 이시이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스승이다.

이시이가 그린 ‘홍련화’는 일본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걸 직접 본 혜문스님은 “그림 속 홍련은 아름다웠다. 현대적 미인이라고 해도 손색없다. 세련된 자태에 최고에 오른 자 만이 풍겨내는 도도함이 묻어나왔다”고 전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가 명월의 주인공을 홍련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명월 생식기 표본의 주인공은 30대에 사망했다. 이시이와 사랑을 나눈 것으로 알려진 홍련도 30대에 사망했다. 이런 이유로 명월과 홍련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다.

이시이와 홍련의 사랑은 당대의 화제였다. 조선의 최고 기생과 일본 최고의 화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세인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이시이는 명월과의 사랑을 남겨둔 채 일본에 돌아갔다. 이시이가 일본으로 간 뒤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됐다. 불꽃 같던 이들의 사랑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혜문 스님은 “모든 정황상 국과수 표본과 일치한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홍련’이 표본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일본에 의해 조선 여성이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명월이 생식기 소송’ 전모

서울중앙지법 민사 37부(부장판사 임영호)는 지난 8월 19일 혜문 스님 등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상대로 낸 여성생식기 표본 보관중지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혜문 스님은 지난 1월 “국과수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생식기 표본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표본 보관 금지와 위자료 2500만 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었다.

당시 법원은 이례적으로 국과수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국과수도 “폐기에 문제가 없다”고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 검증 후 재판부는 “국과수가 생식기 표본을 폐기하는 대신 혜문 스님은 위자료를 포기하라”며 화해권고결정을 내렸지만 국과수가 이의를 신청해 통상의 소송 절차로 복귀했다. 이후 국과수는 생식기 표본을 자체적으로 소각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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