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살의 설날 … 일본군 침입 대비 노심초사
- 아들 돈회는 이순신 최후 지켜본 인물

<한산도 수루>
▲ 1592년 1월 1일(양력 2월 13일). 맑았다. 새벽에 동생 여필과 조카 봉, 아들 회( )가 와서 이야기했다. 어머니와 떨어져 남쪽에서 두 번이나 설을 쇠니, 가슴에 쌓인 지극한 한(恨)을 이길 수 없었다. 병마절도사(종2품)의 군관 이경신이 왔다. 병마절도사의 편지와 설 지낼 선물, 장전과 편전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현재 전하는 <난중일기>의 첫 날 일기이다. 이 일기는 현충사에 소장된 친필 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1592년 친필본 일기에는 1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친필본에 나오지 않는 이 부분은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속의 난중일기에 나온다. 친필본을 편집한 것이라 그런지 그가 실제 남긴 친필본 일기의 문체와 다르다. 대부분 문장이 간결하고,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어머니를 뵐 수 없는 변방의 군인

1월 1일은 설날이다. 이순신 시대나 지금이나 똑 같이 설날이다. 설날에는 부모형제가 모여 함께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먹고, 성묘했다. 그러나 이날 이순신은 48살의 새해를 시작하면서도, 언제 닥칠지 모를 일본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스스로도 쓴 것처럼 남쪽 변방에서 두 번이나 설을 쇠면서 홀로 남아 계신 어머니조차 찾아뵐 수 없었다. 45살의 이순신은 1589년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에 임명되었고, 1590년부터 1591년 1월까지 이순신은 평안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 만포진 수군첨절제사(종3품), 전라도 진도군수(종4품), 전라도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종3품)에 임명과 취소를 반복하다가 2월에 역사의 한 장을 열게 될 전라좌수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정읍현감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2년 사이에 7단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다.

이순신의 승진 배경은 암울하게 밀려오고 있던 일본발 전쟁의 폭풍 때문이었다. 그 시대는 물론 오늘날 드라마와 소설 등에서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으로 지탄받고 있는 선조를 비롯해 당시 관료들은 일본의 침략을 알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대비책이 우수한 장수를 발탁해 전선에 배치하는 것이었고, 당시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있던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도 좌측 최전선의 사령관직이었던 좌수사에 추천·임명케했다.

류성룡은 같은 시기에 형조 정랑 권율을 의주 부윤으로 추천·발탁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은 류성룡의 혜안의 결과물이다. 이 시기에 선조 역시 절박했다. 이순신의 갑작스런 초고속 승진을 대간들이 거듭 반대했지만, 선조는 비판을 물리치고, 이순신의 임명을 강행했고, 그로 인해 이순신의 역사가 쓰일 수 있게 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자리

이순신과 전라좌수사 임명은 훗날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던 원균과도 직접적인 관계있다. 원균이 먼저 그 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들이 이순신의 초고속 승진을 비판했던 것처럼 원균을 비판하며 임명을 반대했기 때문에 원균의 임명이 취소되고, 그 빈 자리에 이순신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사간원은 원균의 근무평가가 낮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원균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592년 2월, 이순신의 이웃 지역인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어 이순신과 함께 역사에 나타났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에 따르면, 이순신과 류성룡, 원균, 허균이 모두 현재의 서울 충무로 출신들이다. 나이로는 원균이 가장 많고, 류성룡, 이순신, 허균 순이다. 동네 선후배 관계이다.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도 유희춘과 퇴계 이황, 허균의 아버지 허엽,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이 충무로 지역과 관련해 언급된다.

《미암일기》 에는 건천동에 살던 유희춘의 집에 “무(武)로 당상관인 원준량(元俊良)이 찾아와 담화를 하고 갔다(1568년 3월 13일)”,  “무과 당상관 원준량이 와서 말하기를 무과에 급제한 그의 아들(원균의 형제)이 어제 금란리(禁亂吏, 오늘날의 경찰 혹은 검찰 관련 공직)를 만났는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뺨을 한 대 맞았다며 그 금란리를 처벌해 달라고 했다(1574년 7월 17일)” 등이 언급된다.

원균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 의병장이었던 정경운의 《고대일록》 1592년 4월 23일 일기에는, “우수사 원균은 사망한 절도사 준량의 아들이다. 평상시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전란이 일어난 처음부터 전함을 타고 적을 방어하며, 하루도 땅에 발을 내린 적이 없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한마음으로 약속하고 온 힘을 다해 적을 추격해 격파했다. 왜적들이 전라도를 넘볼 수 없게 만든 것은 두 수사의 공로”라는 평가도 있다.

<난중일기> 하우스메이트는 ‘한 집에서 각 방을 쓰는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집값 부담을 덜기 위해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한집살이’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점점 증가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속 말들

다시 일기로 돌아가 보자. <난중일기>는 오늘날의 일기가 아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용어와 많은 차이가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도 많다. 이날 일기에 나온 병마절도사는 오늘날의 육군 지역사령관과 같다. 약칭으로는 병사라고 한다. 직급은 종3품인 이순신보다는 두 계급이 높은 종2품이다.

당시 전라병사의 진영은 전남 강진에 있었다. 훗날 원균도 임진왜란 중에 잠시 전라병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순신의 경우는 병사를 역임한 적은 없다. 일기속에 언급된 군관은 하급 장교의 한 부류이다. 군사의 무예와 전술 훈련을 교육하거나, 중앙군 임무를 위해 상경하는 병력의 호송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날 일기를 보면 이순신의 맏아들 이회(李, 1567~1625)가 나온다. 그런데 한문 표현을 보면, ‘豚(돈회)’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돼지 돈(豚)’은 자신의 아들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표현으로는 ‘돈아(豚兒), 가돈(家豚), 미돈(迷豚)’등이 있다. 이순신의 아들 이회는 영화 <명량>에서 배우 권율이 연기했었다. 이회는 전쟁기간 중 이순신 곁에서 이순신을 돕기도 하고, 또 이순신 대신 집안일도 챙기며 바쁘게 오갔다. 이순신이 전사한 1598년 11월의 노량해전 때도 이순신의 전선을 타고, 이순신의 최후를 지켜본 인물이기도 하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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