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를 제왕다운 제왕으로 보좌한 참모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정치가이며 외교관이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6명의 군주를 보좌했다. 본관은 고령,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희현당(希賢堂)이다.

한명회가 세조를 만들었다면 신숙주는 세조를 제왕다운 제왕으로 보좌한 참모였다. 신숙주는 성삼문처럼 사육신이 되지 않아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외교와 국방, 그리고 문화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451년 명나라의 문장가로 소문난 예겸이 조선에 오자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명으로 시짓기에 나서 동박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고, 예겸이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신숙주를 조선의 ‘굴원(屈原)’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신숙주는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 참여하면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13차례나 요동에 다녀오는 집념을 보였다. 또한 1443년에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동아시아 외교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다.

세조는 “당태종에게 위징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신숙주가 있다”며 신숙주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세조는 1462년 46세의 신숙주를 영의정에 발탁할 정도로 통치의 최고 파트너로 삼았다. 이에 신숙주는 세조의 문화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간행했다.

15세기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 정책을 펼치고 여진, 왜, 유구 등과는 교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외교정책에 관해서 신숙주는 세종대왕의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신숙주는 중국, 왜, 몽골, 여진 등의 말에 능통했으며, 자신의 외교 노하우를 후대를 배려해 기록으로 남겼다. 1471년(성종 2),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을 정립하기 위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집필했다. ‘해동제국’이란 일본 본국과 일기(一岐), 구주(九州), 대마(對馬) 양도와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의 총칭이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나에게 바다 동쪽의 여러 나라들과 사신이 오고 갈 때의 관례, 접대하는 절차 등에 대해 편찬해 올리도록 명하시었다. 나는 이를 받들어서 옛 서적을 찾고, 사신으로 보고 들은 것을 참작하며, 그 지형을 그림으로 그리고 왕실의 계보와 풍토, 그들이 숭상하는 것들을 대략 서술하고 응대하고 접대하는 세세한 절목에 이르기까지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었다.”(「해동제국기」 서문)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집필하며 몇 가지 외교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경제제일주의’ 원칙이다. 조일(朝日)무역의 중요성을 알리는 한편, 일본의 핵심 지도층이 권력 분산으로 나뉘어 있어 누구를 어떻게 상대하고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라’는 원칙이다. 일본이 조선에 오는 것은 무역상의 이익을 꾀하려는 것이므로 보내는 것을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을 박하게 하면 회유할 수 있어 침입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무력은 마지막 수단’이라는 원칙이다. 대외 정벌이나 무력을 쓰기에 앞서 나라 안의 정치를 충실히 할 것과 조정의 기강을 먼저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치와 외교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내치가 잘못되고도 외교가 잘된 나라가 없음을 깨우친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다.

「해동제국기」 는 성종 때 처음 나온 이후로 조선 후기까지 일본으로 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외교지침서 역할을 했다. 신숙주는 1475년에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도 성종에게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 것’과 ‘일본과의 화평을 해치지 말 것’을 주청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왕들은 외교에 대한 신숙주의 충언을 받아들였으나, 차츰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함으로써 결국 임진왜란을 겪고, 경술국치를 당하고 말았으니 신숙주의 외교철학을 후대의 군주들이 본받지 않은 탓이다.

일본에서 널리 읽힌 조선 책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이다. 이 두 책이 중립성과 보편성이 있다는 얘기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선이 제일 잘못한 게 일본 정황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임을 반성했다. 그래서 서문에 “신숙주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100년간 일본이 변하는 걸 우리가 몰랐고, 그래서 화(禍)를 당했다”고 썼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을 ‘피로인(披擄人)’이라 불렀는데, 10만 여명의 피로인 중 상당수는 노예로 유럽 등지로 팔려갔고, 30여 년간 돌아온 자는 고작 6000여 명에 불과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6월22일)을 보냈지만, 아직 위안부할머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최근 주일(駐日) 대한민국 대사관이 홈페이지에서 ▲을사보호조약,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한·일합방 등 일본의 역사왜곡 표현을 수정하지 않고 8년6개월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밝혀져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은 ‘을사늑약(勒約, 억지로 맺은 조약)’으로, 안 의사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로, 한일합방은 ‘경술국치(國恥, 나라의 수치)’로 수정해야 한다. 역사의식을 망각한 우리 외교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을 임종 시까지 나라걱정을 했던 신숙주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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