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까지 나라 걱정에 잠못 이룬 날 ‘수두룩’
- 정좌(靜坐) 세속의 티끌을 닦아내는 마음공부 수행


<현충사 십경도 中>
▲ 1592년 1월 3일. 맑았다. 동헌(東軒)에 나가 별방군(別防軍)을 점검하고 검열(點考)했다. 각 고을(官)과 포(浦)에 제송공문을 써 보냈다(題送各官浦公事).

이 날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공식적으로 근무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기록됐다. 1월 1일은 설날이었고, 1월 2일은 나라의 제삿날이라 공식적인 근무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절이고 나라 제삿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사람을 만나고 일을 했다.

그러다 1월 3일에 현재 남아 있는 일기 기록에서는 처음으로 관료들의 공식적 근무인 좌기(坐起)를 했다. 좌기는 지난 호에서 설명한 것처럼 수령이 주관하여 관할관청 내의 관원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업무를 집행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동헌에 나갔다는 것이 바로 그 좌기를 행했다는 것을 뜻한다. 동헌이 바로 좌기를 행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몇 시에 출근했을까.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정확히 몇 시에 출근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른 아침’, ‘새벽’, ‘동틀 때’, ‘닭이 울 때’ 등등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련법 규정은 무엇이었을까. 또 실제 관료들의 출퇴근 기록은 어땠을까.

관료들의 출퇴근 시간 규정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출근은 묘시(卯時, 5~7시)이고, 퇴근은 유시(酉時, 17~19시)이다. 해가 짧은 겨울철에는 출근은 진시(辰時, 7~9시)이고, 퇴근은 신시(申時, 15~17시)”이다. 오늘날의 우리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 봄여름과 겨울의 차이는 일종의 서머타임을 적용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유희춘의 《미암일기》 1568년 7월 18일에 “진시(辰時)에 지평·장령이 이미 출근을 했다는 말을 듣고 출근을 했다”, 1568년 7월 21일에도 “진시(辰時)에 출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관료들의 출근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거꾸로 그들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의 경우는 스스로 기록한 것처럼 온갖 걱정으로 잠을 자지 못하며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깐 눈을 붙이거나 혹은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거나 새벽부터 활동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이순신의 최초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한 두 잠을 자고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날이 샐 때까지 의논했다. 정신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강해서 가끔은 찾아온 사람들과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신 뒤에도 닭이 울면 일어나 촛불을 켜고 앉아 생각하거나, 책과 문서를 읽어보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전략전술을 강의하고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토록 잠을 제대로 자지 않던 이순신이라면, 그가 어떻게 그 긴 전쟁의 시간을 버텨냈을까. 그가 철인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낮잠이라도 자면서 체력을 유지하고 버텨냈던 것일까. 《난중일기》에는 그가 낮잠을 잔 기록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기는 있다.

▲ 1596년 1월 20일. 비가 내내 계속 내렸다. 몸이 아주 피곤해 잠깐(半餉) 낮잠(晝睡)을 잤다.
▲ 1596년 3월 12일. 맑았다. 아침을 먹었다. 몸이 피곤했다. 잠시 자고 일어났다(初罷).

1월 20일의 일기 속의 잠깐을 뜻하는 원문 ‘반향(半餉)’은 본래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한다. 1향은 식사하는 시간 정도로, 반향이라고 하면 그 절반이며 식사시간을 대략 1시간 정도로 본다면 대략 30분 정도를 이순신이 낮잠 잔 것이다. 3월 13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순신은 엄청난 책임감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면서 강철과 같은 정신력으로 버텼고, 또 그 때문에 잔병치레도 많이 해야 했다.

조선 시대 선배들의 새벽은 이순신의 새벽과도 비슷하다. 조선 후기 선비인 윤최식(尹最植)은 《일용지결》에서 선비들의 기상시간이 여름에는 새벽 2시~4시, 겨울에는 4~6시였다고 한다. 일어나자마자 사색 혹은 독서, 출근 준비를 했다.

특히 사색은 기상후 첫 번째 행동이었다. 퇴계 이황이 그 전형적 사례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앉아 향을 피우고 사색, 요즘의 표현으로 한다면 명상을 했다. 마음공부를 한 것이다. 이순신 역시 같은 모습을 기록해 놓기도 했다.

▲ 1594년 9월 1일. 맑았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들 수 없었다. 촛불을 밝혀놓고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고요히 앉았다(靜坐).

9월 1일 일기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은 뒤, 아내를 걱정하다가 쓴 일기의 한 부분이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았다. 일기 속의 ‘고요히 앉았다’는 것의 원문은 ‘정좌(靜坐)’이다. 이 정좌에 대해 최석기 경상대 교수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말하는 정좌는 불가의 좌선(坐禪)이나 도가의 좌망(坐忘)과는 다르다. 앉아 있는 자세가 비록 참선하는 것과 같고, 공부하는 장소가 고요한 곳이지만, 생각을 운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유가의 정좌는 의식과 지각을 열어 놓은 채 마음을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절제하기도 하고, 공경심을 유지하기도 하고, 독서를 하기도 하고, 궁리나 연역을 하기도 하고, 사색을 하기도 하고, 바람소리나 새소리를 듣기도 하고, 지나치는 사물을 보기도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좌는 세속의 티끌을 닦아내는 마음 공부를 위한 절차이며 그 방법이었다. 정좌의 구체적 모습은 최석기 교수에 따르면, “촛불을 켜놓고 의관을 정제하고 꼿꼿하고 바르게 고요히 앉는 방식”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난중일기> 속 말들

■ 각 고을(官)과 포(浦) :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관할하던 고을과 포는 흔히 오관(五官, 다섯 개 고을)·오포(五浦, 다섯 개 포)라고 한다. 오관(五官)은 순천·보성·광양·낙안·흥양이다. 오포(五浦)는 방답·사도·발포·여도·녹도이다. 이 밖에도 장흥과 회령포, 고돌산도 관할했다. 이들 오관·오포와 그곳을 다스리는 수령들은 《난중일기》에 수 없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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