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정두언·김성호 다 뒤졌다”

지난 18일 국회 본청 앞에서 민주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민간인 사찰과 대포폰 게이트를 규탄하며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맹철영 기자] photo@dailypot.co.kr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민간인, 국회의원, 연예인 사찰에 청와대가 개입됐다는 증거를 폭로하고 있다.

한국판 워터게이트인가

민간인을 불법 사찰한 혐의로 기소된 이인규 전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 등 3명이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됐다. 재판부가 ‘지위를 오·남용해 국가가 보호해야할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 행위는 비난받아야 한다’며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전 지원관 등이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 부부를 사찰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로써 일단락 될 것으로 보였던 사찰 파문은 오히려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청와대와 지원관실이 여야 정치인을 비롯해 민간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사찰을 벌였다는 의혹이 다시 제기된 것. 더구나 이 같은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 논란은 당분간 꺼지지 않고 더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 35부(부장판사 정선재)는 지난 15일 강요·직권남용·업무방해·방실수색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에 대해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김충곤 전 점검1팀장과 원충연 전 조사관에게는 각각 징역 1년2월,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또한 지원관실에 파견된 김모 경위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

문제가 되고 있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은 2008년 7월 21일 신설됐다. 지원관실은 국무총리실 소속임에도 불구 청와대 인근에 위치한 창성동 별관에 사무실을 차렸고 같은 해 12월에 이인규씨가 지원관실 책임자로 임명됐다.

지원관실에 대한 의혹은 지난 2009년 10월 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건 민주당 의원은 “지원관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며 문제를 삼고 나선 것이다.

민간인 사찰 논란이 불을 지핀 것은 이듬해인 2010년 6월 21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신건 민주당 의원과 이성남 민주당 의원이 ‘김종익 전 KB한마음(뉴스타트한마음으로 변경) 대표’에 대한 불법 사찰을 폭로하면서다. 이 같은 의혹에 검찰이 지난 7월 9일 총리실을 압수수색했지만 늦장 수색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중요 증거물들이 파기돼 ‘검찰 봐주기식 수사’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또 지난 6월 29일 MBC ‘PD 수첩’이 방영한 ‘대한민국 정부는 왜 나를 사찰했나’ 편은 이런 논란의 불씨를 재차 당겼다. 민간인인 김종익씨 사찰 의혹은 이 방송으로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론이 악화되자 지난 8월 11일 이 지원관 등 지원관실 3명에 대해 강요·직권남용·업무방해·방실수색 등 혐의로 구속 혹은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논란은 더 심화되어 갔다. 법정에서 이 지원관이 “2~3주에 한 번씩 청와대에 정기 업무보고를 하러 갔었다”고 진술해 청와대 개입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도 잇단 폭로전으로 민간인 사찰 의혹에 힘을 실었다. ‘BH(청와대) 하명’메모, 지원관실 하드디스크 ‘BH 보고 폴더’, ‘청와대 대포폰 지급 사실’ 등이 잇따라 공개된 데다 지난 17일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설치되기 이전에 청와대가 직접 사찰한 사례를 확인했다고 주장하고 나서 민간인 사찰은 청와대 개입으로까지 나아간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민간사찰 어디까지 했나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이번 재판 과정을 통해 드러난 민간인 사찰의 전말은 이렇다.

김종익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비방하는 글과 동영상을 개제했다는 이유로 전 방위적인 사찰을 당했다. 현 정부를 비판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 주된 까닭이었다.

이 지원관 등은 국민은행 및 KB한마음 관계자 등을 상대로 지속적인 협박을 일삼았다. 이에 당황한 김종익씨가 자신의 블로그를 폐쇄했지만 이들의 요구는 그칠 줄 몰랐다. 김종익씨가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회사지분도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압력을 받자 국민은행과 KB한마음에도 자신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김종익씨는 KB한마음 대표이사 직을 2008년 9월 19일에 사직하고,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자신이 보유한 KB 한마음 지분 75%를 양도했다.

모든 권리를 포기했는데도 불구, 사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8년 9월 29일 김 전 점검1팀장과 원 전 조사관, 김 경위가 뉴스타트한마음 사무실에 찾아가 가명 ‘이석재’가 기재된 명함을 제시하며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점거반에서 나왔다”며 위세를 과시한 후 사무실과 책상서랍을 무단으로 열고 김종익씨 출국 경위와 뉴스타트한마음 지분 이전 여부를 캐묻고 자료를 제출받았다.

이어 2008년 10월 초순에는 상품권 구입내역과 법인사용카드 내역을 제출하도록 조치했다. 또 2008년 10월 18일 이 회사 경리부장을 지원관실로 불러 추궁했다. 김종익씨가 출국한 경위, 김종익씨가 회사자금으로 구입한 상품권의 사용처 및 회사 자금 횡령 여부를 추궁한 것.

이어 2008년 10월 하순에도 한차례 더 이 회사 대표이사와 경리부장을 불러 호통을 치며 김종익씨가 법인카드로 구입한 상품권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거나 현금화 했는지 여부를 추궁해 조사받게 했다. 한마디로 직권을 남용한 셈이다.

재판부는 이 지원관 외 3명 등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직무범위를 넘어 민간인인 피해자들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고, 업무를 방해하거나 사무실을 수색한 혐의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한다”고 판시했다.

또 “이 전 지원관 등이 김씨를 공공기관 종사자인 줄 착각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인 줄 알면서도 조사했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국민은행 및 KB한마음 관계자들에게 일정한 압력을 행사해 김씨가 대표이사직을 사직하게 하고 보유 지분을 양도하게 한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전 지원관 등이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 부부를 사찰한 혐의에 대해서는 “직권을 남용한 점은 인정되나 남 의원 부인과 분쟁 중이던 이모씨가 자신의 억울함과 관련해 자발적으로 자료를 제출한 정황 등을 볼 때 법률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이 전 지원관등의 유죄판결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던 민간인 사찰은 김종익씨가 한나라당 조전혁·김무성·고흥길·조해진 의원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히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들 의원들이 김종익씨에 대해 색깔론과 횡령, 불법 정치자금 등의 의혹을 제기했었기 때문.


여야 인사 등 무차별 사찰

이와 별도로 민사상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더구나 지난 1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청와대 사찰’의혹을 제시해 민간인 사찰을 뛰어넘는 광범위적인 사찰을 벌였다는 의혹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 의원은 이날 대정부 질의를 통해 2008년 7월 지원관실이 설치되기 전에도 청와대가 직접 사찰한 사례가 있다며 사찰 의혹을 강력 제기했다.

경북 포항 출신으로 국정원에 있다 당시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밑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던 이창화씨가 나모씨 등 3명과 팀을 이뤄 사찰을 진행했다며 의혹을 제기한 것.

이 의원이 제기한 사찰 의혹은 전옥현 전 국정원 1차장 부인, 김성호 전 국정원장,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부인 등 모두 6건이다.

이 의원은 “이 전 행정관은 2008년 8월 3일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등이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 촉구 기자회견을 연 직후 이에 동참한 전옥현 당시 국정원 1차장 부인을 내사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 전 전 차장은 지난해 2월 홍콩총영사로 강등됐다”고 덧붙였다.

또 김 전 국정원장을 사찰한 배경에 대해서는 “김 전 국정원장이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 최측근인 김주성 기조실장의 인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자 이 전 행정관이 청와대에 ‘김성호 국정원장은 친노 성향의 PK(부산경남) 출신만 챙긴다’는 식으로 보고했기 때문에 김 전 원장이 제거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 의원은 “이 전 행정관은 2008년 9월 지원관실에 파견된 후에도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 부인과 친박계 이성헌 의원, 민주당 정세균 전 대표도 사찰한 것으로 안다”며 “자체적으로 확보한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에 대한 내사보고서에 따르면 청와대 민정2팀도 남 의원을 내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의원이 제기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의원은 지원관실 소속 권모 경정과 원모 전 사무관의 수첩 사본 등을 공개하며 추가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원은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트로트 가수에 대한 사찰내용과 더불어 특별수사팀 지휘라인 소속 검사들과 배우자 인적사항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2008년 노동자대회 당시 촛불집회 사진을 전시했던 사진작가 이시우씨에 대한 사찰 의혹도 있다고 주장했다.


재수사 이뤄질까

사찰 의혹과 관련 부실 수사는 사실상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재수사는 없다고 버티고 있는 검찰이 이 같은 잇단 폭로에 재수사에 착수할지에 대해서도 여론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앞서 이석현 의원의 추가 폭로는 한마디로 결정타가 됐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도 지난 18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추가적으로 폭로할 것이 있다고 밝히는 등 가세하고 나섰다.

한편 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 야5당은 지난 8일 ‘민간인 불법사찰 등 대포폰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한데 이어 특검법까지 공동발의하기로 합의해 지난 19일 특검법안을 제출, 정부여당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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