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 속 두 명의 이순신 아시나요
- 충무공과 함께 임진왜란 시작과 끝 동행

<무의공 이순신 묘소, 광명 일직동 두산백과>

▲ 1592년 1월 10일. 비가 내내 내렸다. 방답(防踏)의 신임 첨사(僉使)가 들어왔다.


이날은 새로 부임한 방답의 신임 첨사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방답은 이순신이 관할하던 전라좌수영의 5관(官)·5포(浦) 중 5포의 한 곳이다. 지난 1월 2일 해설에서도 밝혔지만, 5관은 순천·광양·보성·흥양·낙안이다. 5포는 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다. 5포를 지휘하는 장수들 중 방답과 사도는 첨사가, 발포와 녹도, 여도는 만호가 책임자였다.

첨사는 고위직이었다. 종3품으로 정식명칭은 첨절제사다. 육군에는 병마첨절제사, 수군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정3품이었던 수사 바로 밑의 계급이었다. 방답 신임 첨사의 이름도 이순신이다. 이순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인데, 방답 첨사 이순신이라니, 무슨 이야기인가 의아해 할 수 있다. 전라좌수사도 이순신이고, 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찾아온 방답의 신임 첨사도 이순신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다. 발음만 같을 뿐, 한문 이름은 다르다. 즉 전라좌수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고, 방답의 신임 첨사는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다. 李舜臣(이순신)과 李純信(이순신)의 차이다. 충무공과 무의공은 임진왜란 때 함께 눈부신 활약을 했다. 충무공이 있는 곳에 무의공이 있었고, 무의공이 있는 곳에 충무공이 있었다.

다섯 아들의 한 사람, 무의공 이순신

무의공 이순신은 훗날 원균이 이순신을 비판할 때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다섯 아들이라고 평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섯 아들은 바로 이순신과 동고동락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긴밀했던 사람들이다. 순천 부사 권준, 녹도 만호 정운, 흥양 현감 배흥립, 광양 군수 어영담, 그리고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이 그들이다.

무의공 이순신은 이순신보다는 9살 아래인 1554년생이다.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의 후손이다. 즉 조선 왕실의 후예다. 자(字)는 입부(立夫)이고, 시호는 무의(武毅)다. 그래서 무의공이라고 한다. 32살의 이순신이 1576년 정기시험인 식년시에서 급제했다면, 무의공은 그 이듬해인 1577년에 23살의 나이에 특별시험인 무과 별시에서 급제했다.

그 후 의주 판관, 혜산진 첨사로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른 출세로 모함을 당해 파직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전라우수사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활약했고, 출전 당시 동고동락했던 이억기 장군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후 바로 이 즈음에 다시 방답 첨사에 임명되어 내려온 것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바로 그 전년도인 1591년에 전라우수사로 임명되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충무공의 막하 중위장(中衛將)으로 첫 해전인 옥포·합포해전 때부터 출전해 대활약을 했다. 첫 전투일인 1592년 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막 끝낸 뒤에 합포로 도망친 5척의 일본군 전선 대선 1척을 무의공 이순신이 파괴했다. 5월 8일 적진포에서도 일본군 대선 1척을 파괴했다.

이순신이 2차 출전했던 첫날인 1592년 5월 29일에는 전부장으로 출전해 하동 선창에 있는 일본군 전선을 불태워 없앴다. 6월 6일에는 무의공 이순신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산에 올라간 일본군이 반드시 당항포에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에 몰래 나올 것이니, 그들을 바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충무공 이순신 무의공 극찬

충무공 이순신은 무의공의 전략에 따랐고, 무의공은 배를 타고 도망치던 일본군을 공격해 파괴했다. 특히 무의공은 일본군 장수에게 활을 쏘아 명중시켜 떨어뜨렸다. 그날 무의공은 일본군 적선을 빼앗아, 일본군의 <분군기>를 노획하기도 했다. <분군기>는 일본군 3,040명이 자신의 이름 밑에 피로 서명한 문서였다. 충무공 이순신이 3차 출전해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을 치렀을 때 무의공도 참전했다. 한산대첩의 결과를 보고하는 장계에서 충무공 이순신은 무의공 이순신을 극찬했다.

▲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일본군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완전히 사로잡았고, 일본군 4명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적을 쏘아 죽이는 것만 힘썼을 뿐, 머리를 베는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적선 2척을 추격해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1592년 9월 1일 부산해전에서도 무의공 이순신은 선봉이었던 전부장으로 참전해 일본군 대선을 파괴했다. 그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수들과 달리 무의공 이순신은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무의공 이순신의 공로가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충무공 이순신은 조정에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 많은 장수들 중에서도 순천 부사 권준, 광양 현감 어영담,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그리고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등은 특별히 신뢰할 수 있어 함께 죽기를 약속하고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권준과 다른 장수들은 모두 당상관((堂上, 정3품 절충장군 이상)으로 승진했는데, 이순신(李純信)만이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던 무의공 이순신을 신뢰했고, 충무공 스스로 말했듯 함께 목숨을 걸었다. 그 후 무의공 이순신은 1594년에는 충청 수사로, 1597년에는 명량 해전이 끝난 직후 경상 우수사에 임명되었다. 1598년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 중위장으로 참전해 충무공과 함께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아들 이숙은 원균의 동생 원용(元墉)의 딸과 결혼했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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