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가전체 문학작품…구도의 길 제시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신라 제 31대 신문왕(681~692) 재위 기간은 선왕들이 닦아놓은 삼국통일의 바탕 위에 바야흐로 태평성세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신문왕은 고려 4대 광종, 조선 3대 태종과 같이 건국 후에 생기는 공신들의 막강한 힘을 무력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통일신라 수성기에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임금이었다.

설총(薛聰,655년~?)은 고승 원효의 아들로 경전을 우리말로 해석한 한국 유학(儒學)의 유종(儒宗)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신라 십현(十賢)’ 가운데 한 분이다.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에 보면 신문왕 때 설총이 지은 화왕계(花王戒)라는 글이 있다.

한 여름, 신문왕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부니 비록 좋은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 해도 재미있는 해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설총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많이 알 테니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설총은 ‘꽃의 왕(花王)’을 의인화해 임금의 바른 마음가짐과 지켜야 할 덕목을 아뢰었다.

예날 화왕(임금꽃, 모란牧丹)을 정원에 심자, 한 봄 내내 고운 색깔을 발산하고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그러자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찾아와 임금꽃에게 잘 보이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 때 홀연히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고운 얼굴과 붉은 입술과 옥같이 흰 이에다 아름답게 장식한 옷을 입고 맵시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습니다.“저는 눈같이 흰 모래를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보면서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지내니, 이름을 ‘장미’라고 하옵니다. 제가 향내 풍기는 휘장 속에서 임금님의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오니,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이 때 또 한 사내가 베옷에 띠를 두르고 흰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와서 허리를 구부리고 말했습니다.“저는 백두옹(할미꽃)이라 하옵니다. 임금께서는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제거해야 할 것이옵니다. 옛말에 ‘모든 군자는 결핍될 때를 대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임금님도 그럴 뜻이 있으십니까?”이 때 옆에서 누군가가 “이 둘 중 어떤 쪽을 따르시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임금꽃이 대답했습니다. “사내의 말에도 이치가 있지만, 미인은 얻기가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그 말을 들은 사내가 앞으로 나와 말했습니다. “임금께서 총명하고 의리를 안다고 해서 왔는데 이제 보니 틀렸습니다. 무릇 임금들은 아첨을 가까이하고, 정직을 멀리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낸들 어찌하겠습니까?” 이에 임금꽃이 깨닫고, 곧 “내가 잘못했소”하고 사과하였답니다. 장미와 백두옹을 인간계의 간신과 충신에 빗댄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은 신문왕은 “참으로 그 우화에는 나뿐만 아니라 후대의 왕들이 들어야 할 귀감이 될 내용이 들어 있다”라면서 말로만 하지 말고 글로 써 바치라 하여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 ‘화왕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사물은 의인화해 계세징인을 서술한 방식) 문학작품으로 평가되는 ‘화왕계’는 유학의 정신으로 왕도를 펼 것을 권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교 윤리서로 알려졌으며, 유교적 도덕관의 중심 가치를 제공한 설총은 성균관 대성전에 문묘 18현을 배향할 때 제일 앞자리에 모셔졌다.

설총의 가장 큰 업적은, 신라에 한문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유교의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특히 이것은 신라 이두(吏讀, 한자의 뜻과 새김을 빌어 우리말을 적던 표기 방식)의 시초가 된다. 설총은 아버지(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는 효성을 보였다. 이렇듯 원효는 불교를 통해, 설총은 유교를 통해 구도(求道)의 길을 제시하였던 유불의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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