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 그 끔찍한 악명에서 벗어나나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체제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자유 민주 체제를 확립하라”는 이 외침은 전국 대학으로 번져 반정부 시위는 확산되어갔다. 이후 1973년 12월 24일 ‘헌법 개정 청원운동’이 전개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발동했다. 제9호까지 발동된 긴급조치는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벌 받는 경우가 빈발하자 ‘막걸리보안법’이라는 웃지 못 할 별명이 붙기도 했다. 최근 이 같은 유신시대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1975년 유신체제 하에 발동된 긴급조치가 합헌이라고 판결했지만 35년 만에 이를 뒤집은 것이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과 더불어 긴급조치 제1호가 합헌이라는 전제하에 선고한 대법원 판례들을 모두 폐기했다.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오종상(69)씨. 경기도 평택에 살던 오씨는 1974년 한 모임에서 “우리나라가 부패돼 있으니 이것이 무슨 민주체제냐. 유신헌법 체제 하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회는 차라리 일본에 팔아넘기든가 이북과 합쳐서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국민적 저항 탄압 위한 것’

35년이 흐른 지난 12월 16일, 오씨의 재심에서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판결한 원심을 깨고 대법원 전원합의체 만장일치로 대통령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기존 재심 판결들은 반공법 위반 혐의 등은 무죄로 선고해왔으나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해당 조치가 해제·실효됐다는 이유로 처벌규정이 없을 때 내리는 면소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제1호는 유신헌법 등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전면금지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어 “긴급조치 제1호는 발동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긴급조치 제1호가 해제 내지 실효되기 이전부터 유신헌법에 위반되어 위헌이고, 긴급조치 제1호에 의해 침해된 각 기본권의 보장 규정을 두고 있는 현행 헌법에 비추어 보더라도 위헌이다”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는 국회의 입법권 행사가 없었던 만큼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대상이 되는 법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긴급조치에의 위헌 여부에 대한 심사권은 최종적으로 대법원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오씨 외에도 긴급조치 1호로 처벌을 받은 고 장준하 선생 유족과 백기완씨 등 재야인사들도 2009년 재심을 청구해 법원이 재심 개시 여부를 심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 기소 589건

이번 판결을 시작으로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피고인들의 재심 청구도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된 사람들이 오씨의 경우처럼 무죄 판결을 받는 것에는 걸림돌이 적지 않다. 대법원의 위헌판결의 효력은 해당 사건에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심 개시 요건에 해당할 경우에만 재심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재심 개시 요건은 증거가 위조 또는 변조된 것이 증명되거나 수사과정에서의 가혹 행위 사실이 증명된 경우 등으로 제한되어 있다. 오씨의 경우는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가 인정된다”는 이유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재심 개시 요건이 충족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에 한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에는 오씨 등이 낸 긴급조치 1호와 관련된 헌법소원이 계류 중에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내릴 경우 해당 법률은 효력을 상실하고 해당 법령 자체가 무효가 된다. 때문에 헌재가 오씨의 헌법소원 심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세간의 관심이 쏠려있다.


대부분 술자리서 정부 비판한 죄

진실화해를위한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에 따르면 현재까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589건에 달한다.

진실위가 589건의 사건을 모두 조사한 결과, 48%에 달하는 282건이 술을 마시거나 수업 중 박정희 전 대통령 및 유신체제를 비판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신반대 및 긴급조치 해제 촉구시위, 유인물 제작과 같은 학생운동 관련 사건이 191건으로 32%이고 반유신 재야운동 및 정치활동은 85건(14.5%), 국내재산 해외반출 및 공무원 범죄가 29건(5%), 간첩사건 2건(5%)으로 파악됐다.

긴급조치별로는 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 위반이 36건에 달했고, 긴급조치 제3호 위반 9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긴급조치 제9호를 위반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긴급조치 제9호 위반자들에 대한 실형선고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야당, 박근혜 대표에 맹공 퍼붓기도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야당은 일제히 환호했다.

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사법부가 앞으로도 계속 권력기관들의 권력남용을 제한하고 국민의 기본권 수호에 앞장서야한다”고 강조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유신 관계자들은 국민과 역사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는 글을 올린데 이어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이 중요한 이슈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유리한 얘기일 경우 고개를 쳐들고 말씀을 한다”고 공격했다.

민주노동당도 “이번 판결은 역사적 심판이 법적으로 재확인 된 것으로 사필귀정”이라고 밝혔으며, 진보신당도 “독재정권에 의해 전 국민의 입이 재갈 물리고 기본권을 박탈당했던 어두운 역사의 질곡을 이제라도 위로한 판결이었다”고 평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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