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병장교에 과학기술자 이봉수 ‘혁혁한 공’
- 화약 핵심원료 염초제조 3개월간 1,000근 생산

<여수 종구산 봉수, 산림청 산림문화원>
이순신이 13척으로 일본군의 133척을 이긴 명량해전에는 항상 전설같은 이야기가 따라 다닌다. 철쇄, 즉 쇠사슬 전술이다. 명량의 좁은 길목에 쇠사슬을 설치해 일본군의 전선을 전복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난중일기》에 철쇄 이야기가 나올까? 명량해전 철쇄설은 이순신이 실제로 전쟁 발발전에 설치했기 때문에 생겨난 전설이다.

▲ 1592년 1월 11일. 이슬비가 내내 내렸다. 늦게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이봉수(李鳳壽)가 선생원(先生院)에 있는 석재를 떠내는 곳에 가서 보았다.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이미 큰 돌 17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고 했다. 서문 밖 호자(壕子)가 네 발 쯤 무너졌다. 심사립과 이야기했다.

11일 일기에는 철쇄와 전혀 관계없이 보인다. 그런데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되는 《난중일기》에 철쇄설과 관련된 일기는 바로 이 일기부터다. 이봉수가 선생원의 돌산에 가서 돌덩어리를 떼어내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바로 이 돌덩어리가 철쇄설과 관련돼 있다.

철쇄설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날 일기에서 짚어볼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이봉수(李鳳壽, 1553~?)라는 사람이다. 이봉수는 전쟁 전부터 아주 다양한 일을 했다. 전쟁 기간 중에도 전투는 물론이고 이순신을 이순신으로 존재하게 했던 막중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봉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보고서를 보면, 그는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지만, 매우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칼만 쓰는 군인이 아니라,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공병 장교였고, 과학기술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주 성실했다. 1592년 2월 4일, 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봉수가 쌓고 있던 봉수대를 시찰하고는, “쌓는 자리가 아주 좋았다. 허물어질 까닭이 전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칭찬했다.

군인으로서 이봉수의 활약부터 살펴보면, 이순신이 첫 출전했던 1592년 5월 7일과 8일에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이봉수는 특히 적진포 해전에서 활약해 일본군 대선 1척을 불태워 없앴다. 5월 29일, 이순신의 2차 출전 때는 “이봉수 등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힘써 싸웠다”고 승전보고서에 명기할 정도였다. 그런 신임의 결과로 이봉수는 2차 출전 승전보고서를 갖고 피난 중인 조정에 올라가기도 했다.

1593년 2월 3일에는 이순신의 명령으로 정사립(鄭思立)과 함께 도망간 수군을 80여 명 중 70여 명을 체포해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이봉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난중일기》에서 사라진다. 《선조실록》 등을 보면, 이봉수는 1594년 서흥 부사(瑞興府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수사를 거쳐 1602년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로보면 이봉수는 1594년경 새로운 관직을 부여받고, 이순신 곁을 떠났던 듯하다.

공병 장교 이봉수는 전남 여수시 군자동 종고산(220m)에 봉수대를 쌓기도 했고, 좌수영을 방어하는 성을 쌓고 성 주위에 해자를 파기도 했다. 또 여수 좌수영과 돌산도 사이 바다에 철쇄를 설치했다.

과학자 이봉수의 모습은 이순신이 1593년 1월 26일 쓴 <석류황을 내려보내 주길 요청하는 장계>에 나온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는 각종 화포이다. 판옥선과 거북선에 실린 화포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결코 해전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이다. 그만큼 화포가 조선 수군의 시작과 끝이었다. 그러나 그 화포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요했다.

이순신은 1592년, 모두 4차례 출동하면서 최소 324척, 1만여 명의 일본군을 화살과 화포로 격파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 전사자는 최대 100명, 부상자는 500명 정도였다. 게다가 전선은 단 한 척도 파괴되지 않았다(*이순신 부대의 전사자 38명, 부상자 176명을 기준으로 어림잡아 보면). 이순신의 수군은 완전한 승리를 했다.

그 결과를 만든 것이 바로 화포였고, 화포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요했다. 4차례의 출동이 끝난 뒤 조선 수군은 화약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때 이봉수가 화약의 핵심 원료인 염초 제조 방법을 찾아 3개월 동안 1,000근을 생산했다. 염초는 질산칼륨으로 초산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최무선이 중국 상인에게 화약을 만드는 법을 배운 것도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핵심이었다.

염초 제조를 위한 조선의 노력도 아주 다급했다. 그래서 선조는 1593년 2월 16일, 일본군에 부역했던 김덕회를 통해 “일본군의 정세와 염초, 조총 제작법 등을 자세히 알아내라”고 지시했고, 또 3월 11일에는, “조총을 만드는 법은 익혔으나, 염초를 굽는 방법은 아직 익히지 못했다. 이번에 사로잡은 일본군이 염초를 굽는 방법을 안다고 하니, 죽이지 말고 살려두어 그 방법을 알아내라”라고 하기도 했다.

이봉수는 조정에서 그런 논의가 있기 직전에 염초 제조 방법을 발견했고, 생산했다. 염초 제조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그 후의 다른 기록에도 나온다. 1595년 5월에는 충청도 서천의 임몽이라는 사람이 5일 만에 염초 1근을 만들고, 또 계속 만들어내자 선조가 임몽에게 정6품의 관직을 내렸다. 그런데 이봉수는 1593년 1월, 3개월 만에 1천근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가 1592년 가을부터 염초를 생산했다는 이야기이며, 그가 얼마나 탁월한 과학자였는지도 보여주는 사례이다.  철쇄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서 하기로 한다.

<난중일기 속 말>

▲ 선생원(先生院)은 성생원이라고도 부른다. 여수시 율촌면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못했다. 선생원의 ‘원(院)’은 여행자를 위한 관용 숙박 시설을 말한다.

▲ 호자(壕子)는 해자(垓字·垓子)라고도 한다. 성(城)을 방어하기 위해 적이 접근하기 어렵도록 성 밖 둘레를 파서 물을 채워 놓는 곳이다. 이은상은 단위 설명 없이 ‘발'로만 번역했다. 把(파)는 개수를 셀 때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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